[우리문화신문=이상훈 교수] 오늘은 앙카라에서 이스탄불까지 450km 거리를 기차로 이동하는 날이다.
우리는 아침 9시 40분에 앙카라역을 출발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지하철로 이동하였다. 역에 도착하여 우리는 터키 남부의 항구 도시 안탈리아에서 온 30살 터키 청년(Mr. Berker Ekmekci)을 만났다. 이 청년은 로자씨가 인도에서 SNS를 통하여 알게 된 친구인데, 원래 고향은 트라브존이다. 트라브존은 터키의 북쪽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로서 흑해에 면해 있다.
이 친구는 지중해 항구도시 안탈리아에서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데, 휴가를 내어 고향에 왔다가 우리를 만나기 위하여 앙카라로 왔다. 이 친구가 우리에게 특별한 것은 그가 1986년 체르노빌(당시는 소련 영토, 지금은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속함)에서 발생한 원전 사고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체르노빌에서 퍼져 나오는 방사능은 계속해서 주변의 공기와 물과 흙을 오염시키고 있는데, 오염된 물은 강으로 흘러들고 강은 흑해로 흘러들어 흑해가 방사능으로 오염되었다. 그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발생하고 3년이 지난 1989년에 태어났는데, 어머니와 그는 모두 암이 발생하여 평생 암과 투쟁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한다. 그가 자기의 이야기를 영어로 기록하여 병산에게 보낸 누리편지는 한글과 일본어로 번역하여 아래 주소에 올려 놓았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탓에 암과의 투쟁으로 사는 터키 청년의 편지
흑해의 방사능 오염에도 불구하고 터키 정부는 2010년에 러시아의 국영 원자력에너지사와 계약을 맺고 현재 원전 3기를 아큐유에 건설 중인데, 2023년에 가동할 예정이다. 일본과 한국은 터키의 시노프 제2 원전 건설 수주를 두고 경쟁하였는데, 일본이 2013년에 수주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 안전 대책이 강화되면서 건설 비용이 2배로 늘어나자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은 2019년 초에 사업을 포기하였다.
터키는 오랫동안 권위주의 정부가 계속되어 우리나라나 유럽처럼 환경 단체가 탈원전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것 같다. 탈원전을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 단체가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 하는데, 터키에서는 시민 단체가 활성화되지 못한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가 탄 기차는 내부 시설이 고급스럽고 쾌적한 고속열차였다. 기차는 앙카라역을 아침 9시 40분에 출발하여 계속해서 서쪽으로 달려갔다. 2시간쯤 달리니 주변 풍경이 변하였다. 들판에 작물이 보이고 산에는 숲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3시간쯤 달리니 밭과 숲에 둘러싸인 마을들이 자주 나타났다. 고도계를 살펴보니 해발 100m다. 기차는 아나톨리아 고원을 지나 평야 지대를 지나가고 있다.
기차 안에서 나는 줄곧 안사리의 책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흥미 있게 읽었다. 오랫동안 이슬람 지역에 견주어 낙후되었던 유럽이 세계사의 주역으로 발전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산업혁명이다. 유럽에서의 산업혁명은 증기기관부터 시작하여 1800년 전후에 계속해서 이어진 여러 가지 발명 덕분이다. 새로운 발명이 언제나 성공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발명을 받아들이는 사회적 조건이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안사리는 증기기관을 예로 들었다.
놀랍게도 증기기관은 서양에서 나타나기 300년 전에 이미 이슬람 세계에서 발명되었지만, 이슬람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였다고 한다. 한 무명의 기술자가 발명한 증기기관은 쇠꼬챙이를 돌리는 동력으로 이용되어 부자의 잔치 마당에서 양 한 마리를 통째로 더 효과적으로 구울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장치에 대한 묘사가 1551년에 튀르크 기술자가 쓴 책에 나온다. 하지만 쇠꼬챙이 이후로 아무도 증기기관의 응용법을 추가로 개발하지 않았고 증기 기관은 그냥 잊혀버렸다.
왜 무슬림 기술자들은 증기 동력으로 방직기계처럼 물건을 대량 생산하는 장치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 까닭은 안사리의 설명에 따르면 이슬람 세계에서는 수백만 명의 장인이 수공업으로 좋은 물건을 만들고 효율적인 교역망을 통해 공급이 잘 이루어져 소비재가 넘치는 사회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무슬림 발명가들은 상류층을 위해 일했는데, 상류층 사람들은 필요한 모든 물건을 이미 소유했으며 대량 생산의 필요성을 느낄 수가 없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는데, 이슬람 사회는 발명을 대량 생산 도구로 연결할 필요가 없는 풍족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마크 엘빈이라는 역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이슬람 사회는 너무 잘 굴러가서 ‘높은 수준의 평형 상태라는 덫’에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의 표현을 빌자면 이슬람 세계가 ‘성공의 저주’에 빠졌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아무튼, 안사리의 견해는 매우 흥미로운 관점이었으며 더욱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기차는 4시간 반을 달려서 이스탄불역에 낮 2시 15분에 도착하였다.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이스탄불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이스탄불은 인구 1,465만 7,000명 (2015년 추계) 면적 1,539㎢로써 터키에서 제일로 큰 도시다. 보스포루스 해협 양쪽으로 도시가 발달해 있는데, 동쪽은 아시아 그리고 서쪽은 유럽으로 간주한다. 유럽 지구에 주민의 3/4 이상이 거주하며, 주요 상사ㆍ호텔ㆍ사무실 등이 집중되어 있다.
기원전(BC) 8세기에 그리스인들이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으로 이곳에 처음 도시를 건설했다. 그 뒤 서기 330년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 도시를 로마의 수도로 정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이라고 고쳐 불렀다. 395년 동서 로마가 분할되었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부른다. 이 도시는 1203년 제4차 십자군에게 점령당해 로마 가톨릭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가 1261년 다시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매흐매트 2세가 1453년 21살의 나이에 이 도시를 점령하여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켰다. 술탄은 이 도시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았다.
1923년 터키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수도가 앙카라로 옮겨졌으나 이스탄불은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스탄불은 역사적인 유적이 많고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어우러져 있는 독특한 도시이다. 이스탄불은 여행자들이 뽑은 여행하기 좋은 도시로서 프랑스의 파리와 함께 쌍벽을 이룬다. 어느 여행 작가는 이스탄불을 “40대 중반의 요염하고 가장 매력적인 여인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신비한 도시”라고 표현했다.
도시의 설명을 읽어 보니 이스탄불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 살아생전에 꼭 한번 가보아야 하는 도시라고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