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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지금은 역사를 읽어야 하는 때

역사, 과거를 통해 미래도 함께 통찰한다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59]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조선 후기 숙종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장희빈으로 인한 것이다. 숙종의 총애를 받아 소의(昭儀) 장 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 아들을 원자로 삼고 소의를 희빈으로 승격시켰는데, 이에 송시열을 대표로 하는 서인(西人) 세력이 이를 극력 반대하자 숙종이 당시 정권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을 유배 보내 사사(賜死)케 하였다. 이로 인해 정치의 중심은 서인(西人) 세력에서 남인(南人) 세력으로 일시 이동하였는데, 이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고 한다. 숙종 15년, 1689년의 일이다.​​

 

이 기사환국에서 당대의 거유(巨儒) 송시열이 몰락한 것과 동시에 그를 떠받치던 서인 김수흥(金壽興1626~1690)ㆍ김수항(金壽恒1629 – 1689) 형제가 파직, 유배를 당해 사사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김수항의 아들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은 당시 대사성을 지내는 등 일찍 관계에서 이름을 날렸으나 이 기사환국으로 아버지 수항이 사사(賜死)된 뒤에는 일체 관직을 사양하고 시골에 은거하면서 문학과 유학에 정진해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도 이름을 날렸다.

 

그러한 김창협이 30살 때인 1681년(숙종 7년) 홍문관 수찬으로 있을 때에 관원들의 공동명의로 임금인 숙종에게 글을 올린 것이 있다. 관원들 공동 명의라고 하지만 김창협의 문집에 실려있는 것을 보면 김창협이 주도해서 쓴 글이라고 봐야 한다. 이 글에서 김창협은 역사를 읽는 방법을 임금에게 아뢴다.

 

송나라 학자 동래(東萊) 여조겸(呂祖謙,1137~1181)이 말하기를,

 

“역사서를 볼 적에 그저 다스려진 것을 보고는 다스려졌다고 생각하고 어지러움을 보고는 어지럽다고 생각하며, 한 가지 일을 보고는 오직 한 가지만을 아는 데에 그친다면 역사서를 보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역사서를 읽을 때, 마치 자신이 그 속에 있는 듯이 여겨 어떤 일의 이해와 시대의 어려움을 보면 반드시 책을 덮고 만일 자신이 그런 일을 당한다면 어떻게 대처할까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역사서를 보면 학문도 진보되고 지식도 높아질 것이니, 그래야만 유익할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역사서를 읽을 적에는 먼저 전체적인 성향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어서, 한 시대의 기강과 풍속 및 소장(消長, 쇠하여 사라짐과 성하여 자라남)과 치란(治亂, 잘 다스려진 세상과 어지러운 세상) 등을 합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진(秦)나라의 포학함과 한(漢)나라의 관대함 같은 것이 다 전체적인 성향이니, 이처럼 한쪽으로 치우친 것과 말류의 폐단이 드러난 부분을 함께 고찰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또 한 임금의 전체적인 성향을 알아야 하는 것으로서, 예를 들면 한 문제(漢文帝)의 관대함과 한 선제(漢宣帝)의 엄함 같은 따위이다. 전체적인 성향이란 대체적인 성격인데, 예를 들어 한 시대의 전체적인 성향이 관대하다면 한두 임금이 다소 엄하다 해도 그 관대함에는 크게 문제 되지 않고, 한 임금의 전체적인 성향이 엄하면 한두 가지 일이 다소 관대하다 해도 그 엄함에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

 

라는 글을 올린다.​

 

김창협은 이어 역사를 읽으면서 작은 사건에 깊이 매몰돼 사건의 의미를 놓치면 안 되며, 한 나라의 한 시대, 그것이 한 나라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성격으로 파악하고 그런 큰 흐름 속에서 각각의 역사를 봐야한다고 말한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 다시 동래 여조겸의 말을 제시한다.​

 

“신들이 살펴보건대 역사서를 읽는 방법에 대해 과거의 학자들이 논한 것이 많지만 여조겸(呂祖謙)의 이 말처럼 자세한 것은 없습니다. 경서는 이치를 논하고 역사서는 사건을 기록한 것이니, 배우는 사람은 공부할 적에 경서를 근본으로 삼고 역사서는 말단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일이 이치 밖에 있지 아니하고 이치가 일 밖에 있지 아니하니, 그렇다면 역사서에 기록된 것도 모두 이치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비록 이롭고 해로움, 옳고 그름, 다스려지고 어지러움, 흥하고 망한 기록이 수천만 가지라서 궁구하기 쉽지 않을 듯하지만, 사건에 따라 그 이치를 연구해 보면 모두가 다 그렇게 된 까닭이 있으며 모두가 다 대처하는 방도가 있으니, 만일 잘 보고 터득하는 것이 있으면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여 도리에 밝아지는 공부가 어찌 이 밖에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한갓 대충 섭렵하여 읽을 뿐이라면 이치를 알거나 마음에 터득하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사로이 총명을 발휘하여 지식이나 넓히고 올바른 의지를 잃어 실제적인 공부를 해치는 수단이 되고 말 뿐입니다. 이 또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 《농암집》 제10권 / 강의(講義) 옥당고사(玉堂故事)를 덧붙임​

 

날씨가 무더운데 책을 읽고 역사의 의미를 파악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옛날에 오늘날과 같은 에어컨 시설이 없었기에 아무리 부채를 열심히 부친다고 해도 관직에 나가면 옷을 마구 풀어헤칠 수도 없고, 긴 머리를 틀어 올린 상투에 사모를 써서 덮으면 머리에 나는 땀은 또 어이할 것인가? 그래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초복(初伏)부터 처서(處暑)까지는 경연도 열지 않고 일을 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그런데 김창협이 임금에게 글을 올린 그해 여름 홍문관의 부교리였던 오도일(吳道一.1645∼1703)이 가장 무더운 한여름철에도 임금에게 상소한다.​

 

“공부란 하루가 급한 것이므로 일반 관례를 깨고 수시로 법강(法講)을 열더라도 안 될 것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일을 처리하시는 틈을 이용해 자주 소대(召對, 왕명으로 임금과 정사에 대한 의견을 나눔)를 하고 계시지만 혹은 편한 차림으로 만나시거나 혹은 방안으로 들어와서 보게도 하시면 마음의 우울을 풀고 몸을 보양하는 데도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 《국조보감》 권44​

 

더운 기간에도 편하게 사람을 만날 것을 종용한 것이다. 이거야 말로 귀찮고 힘든 일이지만 당시의 신하들은 어떻게 하면 임금을 학문과 수양이라는 미명 아래 묶어둘 것인가를 늘 연구한 결과 무더위에도 임금을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는다.

 

 

오, 참으로 불쌍한 임금이여! 조선시대 임금이란 자리는 영광보다도 고통이 더 많아서, 본인들은 늘 신하들의 견제와 간섭 속에 자기 하고 싶은 일을 전혀 하지를 못했으니 얼마나 가련하랴. 원래 무더운 여름에는 좀 쉬는 것이 당연한데도 신하들이 그냥 안달복달을 해대는 것이리라.​

 

이번 주말이 처서란다. 옛날 풍습으로 보면 임금도 쉬다가 처서를 계기로 업무에 복귀한다. 우리나라도 이제 사실상 여름휴가는 끝나고 사람들이 일상에 대부분 복귀한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길고 긴 장마가 드디어 끝이 난 듯 비가 그치고 다시 불볕더위가 시작돼 덥지만, 처서를 앞두고 서늘한 바람이 그 속에 불어오기 시작하는 요즈음 우리도 역사를 읽어보는 것이 어떠한가? 여름 내내 큰 비도 많이 오고 불볕 무더위도 오고. 그런 가운데 정치권은 계속 으르렁거렸는데. 이제 국민뿐 아니라 정치하시는 분들도 조용히 역사책을 읽고 거기서 여조겸이 말했듯이 역사와 시대의 큰 흐름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 흐름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것을 고루 보아야 하며 그 과거를 통해 미래도 함께 통찰해야 한다. 역사는 곧 경제 사회문제를 해결할 교과서일 것이다. 그를 통해서 우리들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급격하거나 과격한 방법이 아닌, 누르고 빼앗고 하는 방법이 아니라 바른쪽으로 인도하고 더 보태주는 방법에서 찾을 일이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일 터. 이제 처서 이후는 그렇게 역사를 읽고 보다 냉정하게 나라의 앞길을 생각하는 그런 시간의 분수령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