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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1973년 9월, LA에 <재미국악원>을 세우다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94]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 이어 김동석 교수(Don Kim)의 국악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는 대학 2년 때 조영남, 문호근, 이건용 등과 <서울음대 연극부>를 만들어 공연하기 시작하였고, 3학년 때에는 <중앙여자고등학교>의 가야금 강사로 위촉되어 한 학년 전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는 이야기, 군 복무를 마치고 <리틀엔젤스 어린이 무용단>의 음악담당 교사가 되어 미국 닉슨 대통령이 있는 백악관과 일본에서는 천황 부부가 참석한 자리에서 공연하여 주목을 받았다는 이야기, 그러나 그의 관심은 UCLA에 민족음악학과가 있다는 사실과 그곳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리틀엔젤스와 해외 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김 교수는 유학 준비를 서둘렀다. 우리말에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 오래지 않아 UCLA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고, 1971년 6월, 꿈에 그리던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외국, 특히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일상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고 녹록한 일이 아니란 점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의 구구절절한 회고담이 유학 초기의 어려움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막상 미국에 도착했으나, 빈손으로 온 내가 대학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어요. 유학생들이 공통으로 겪는 일이겠지만, 학생 신분으로는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았지요. 나는 음악 활동 말고는 아는 것도, 또한 한 일도 별로 없었어요. 이곳에서 공부를 위해, 그리고 생활을 위해 일반 노동을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었어요. 다행히 이곳에 먼저 와 있던 국악고교의 동기생 박헌린 군과 선배인 박종길, 이동엽, 이동형 등이 있어서 의지는 되었지만, 막 노동자 생활은 정말 힘들었어요. 당시 시간당 임금이 $1.25였는데, 등록금 $7,500과 생활비를 마련하려면 하루 3~4시간 잠을 자고, 세 군데 일자리에서 노동자 생활을 해야 했어요. 등록금을 해결해야 학생 신분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추방을 당하기 때문이지요.”

 

그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캘리포니아 스테이트, 로스앤젤레스 대학교 음대 교수이던 <현대 음악> 전공의 김병곤 박사를 만나게 된다. 김 박사는 김동석에게 “먼저, 생활의 기본을 다진 다음, 그다음에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라는 충고를 해 주었다. 동시에 생활도 하고, 공부도 한다는 것이 어려웠기에 그의 충고대로 당분간은 음악공부를 뒤로하고, 먼저 생활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김동석이 선택한 그 길이란 바로 치과 기공 학교에 들어가서 기공으로 직장을 잡게 되는 길이었다. 그 선택은 적중해서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미국 생활 3년 만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그다음 해에 딸(나리)을 얻게 되었다. 그 딸이 현재는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이며, 2명의 자녀를 둔 엄마가 되었다.

 

본격적인 미국 생활을 위해 직장 생활을 접고, 사업을 시작하였다. 처음엔 <세븐 일레븐 프랜차이즈>를 시작해서 한국 마켓과 미국식당, 등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생활의 안정도 찾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시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집 근처에 있는 호프대학교(Hope University)에서 지휘와 종교음악으로 학사와 C.S. 대학교에서 교회음악의 민족학(Ethnomusicology in church music)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 초기, L.A 지역에는 10여 명의 국악인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공연차 왔다가 단체가 해체되는 바람에 잔류한 사람들과 일부 유학 온 사람들이다. 잔류하게 된 배경은 1964년도에 창단한 김생려의 <아리랑 가무단>이 세계의 유명 도시를 찾아 순회공연을 하였는데, 라스베이거스 공연을 마지막으로 해체되기에 이른다.

 

대부분의 단원은 귀국하였으나, 일부는 미국에 잔류하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국악고교 선배인 문영삼(가야금 전공), 이동엽(대금)과 그의 부인, 이동형(피리), 동기생 박헌린(해금) 군 등이 있었고, 유학파로는 박종길 선배(소금)와 부인 채희아(서울음대 가야금 전공), 그리고 무용인 약간명과 뒤늦게 합류한 김 교수 등이 L.A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국악과 무용 전공자들 10여 명은 각자의 생업에 매달리다가 월 1~2회, 때로는 주 1회, 모여서 합주도 해보고, 담소도 나누면서 향수를 달래곤 하다가 1973년 5월, 본격적으로 L.A에 <재미국악원>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활동을 같이하기로 했다. 초대회장에는 이동엽, 부회장에 박종길, 그리고 총무에 김동석이 뽑혀 동우회 모임인 재미국악원이 시작된 것이다.

 

 

 

L.A에 거주하고 있는 국악인들이 재미국악원을 결성하였다는 입소문, 그리고 연습과 소모임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문은 이주민 사이에 조금씩 퍼져 나갔다. 재미국악원이라고는 하나, 악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여서 때로는 활동하기도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한 소식을 전해 들은 백인명 여사는 상당액의 기부금을 쾌척하여 고국으로부터 악기들을 사서 급한 대로 현상을 유지하였다고 한다.

 

현재 L.A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의 수는 62만으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에는 5천 명으로 추정되던 시절에 <재미국악원> 창단 연주회가 1973년 9월 23일, L.A 무궁화 학원에서 조촐하게,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서 열린 것이다. 이 연주회에는 마침 L.A를 방문 중이던 리틀엔젤스 어린이 예술단의 반주음악 담당자들도 참여하여 의미를 더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한국의 정악(正樂)인 ‘수제천(壽齊天)’ 연주를 시작으로 국악 전공자들에 의한 우리의 음악과 춤이 처음으로 선을 보이는 역사적인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