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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청나라와 화친할 수 없다고 죽음 택한 삼학사 사당 '현절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임진왜란을 겪은지 30여년 만에 또 다시 당한 외침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병자년(1636년)에 당한 오랑캐의 침략'이란 뜻으로, 임진왜란 후로도 전쟁 대비보다는 당쟁으로 국방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지 못한 결과로 또 다시 침략을 당하여 임진왜란 때는 당하지 않았던 치욕을 당하였다고 하여 한국역사상 최악의 치욕이라고 한다.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추운 겨울을 견디지 못하고 송파구 삼전동으로 내려와 청나라 황제가 있는 선양을 향하여 삼배구고두(三跪九叩頭禮)(세번 큰절을 하면서 무릅을 꿀고, 머리는 아홉번 땅에 부딪치는 절)의 예로 항복한 뒤 청나라와 화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조선에서는 청나라는 변방에서 일어난 오랑캐이므로 청나라와 화친하는것은 조선이 사대해야 하는 명나라를 배반하는 일로 청나라와는 화친을 극구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척화파라고 부르는데, 그 중 맨 앞에서 전쟁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홍익한, 윤집, 오달재로 이들을 역사에서는 삼학사(三學士)라고 부른다.

 

인조가 항복한 뒤, 척화파의 3인은 선양으로 끌려간 뒤 청황제로부터 이제라도 마음을 돌려 청나라를 상국으로 받들 수 있느냐는 회유를 받았으나, 이들은 청나라 황제 앞에서 죽으면서도 오랑캐인 청나라에 사대를 할 수 없다고 하여, 결국 참형을 당하였다. 그렇게 죽은 삼학사는 조선 조정으로부터 충신으로 추앙하여 시호를 내렸다. 홍익한은 충정(忠正), 윤집은 충정(忠貞), 오달재는 충렬(忠烈)로 시호를 받고 모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이후 50여년의 세월이 흐른뒤 숙종14년(1688) 병자호란으로 절개를 지킨 삼학사의 넋을 위로하고 그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피신했던 남한산성 안에 사당을 세웠다. 숙종은 이에 현절사라는 사액을 내리고,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의 대표였던 김상헌과 인조가 항복하던 날 자결함으로써 충성를 표시한 정온을 추가하여 모시게 되었다.

 

현절사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작은 집이나, 현절사 외곽을 돌담으로 두르고, 사당은 별도로 담장을 둘러서 격을 높였으며, 출입문은 사당앞에는 작은 내문을 두었고, 외부 담장의 앞에도 외문을 두었으며, 부속건물로 제사를 주관할 수 있는 동재와 서재를 두었다.

 

한민족은 전쟁을 당하여 죽을 지언정 항복하지 않는다는 고귀한 정신으로 살아왔다. 고대 삼국시대의 중국의 수나라 당나라의 침략에도, 고려시대 거란, 몽골의 침략에도, 이후 임진왜란 때나, 병자호란 때나, 조선말에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활동으로 한민족에 흐르는 끊임없는 불굴의 정신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스스로 힘을 기르지 못하고 외세에 맞서는 것은 이땅에 사는 백성들에게 무한한 고난을 강요하는 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한국을 침략했던 나라들이 많고 잠시 지배한 적도 있었지만, 이들은 그 때마다 한겨레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일을 당하기 전에 지도자들이 바른 정신으로 국민의 앞에서 늘 개혁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다시는 국난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도 국토의 황폐화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현절사는 남한산성 내 남한산성관리소 앞에서 올라가는 언덕 위에 있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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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