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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이석영, 독립운동 명문가 이회영 일가의 숨은 영웅

《그 뜻 누가 알리오!》, 노항래, 도서출판 은빛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영석 이석영(穎石 李石營).

그 이름을 세간에 묻거든 십중팔구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할 것이다.

그만큼 이석영 선생은 역사에 기록 몇 줄 남기지 않은 채 조용히 스러져갔다. 한때는 조선을 주름잡는 권문세족의 후계자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재산은 조선 팔도 다섯 손가락에 꼽을 만큼 엄청났고 벼슬은 고종을 지척에서 보좌할 만큼 높았으며, 집안 또한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삼한갑족이라 불리는 명문가였다.

 

그러나 망국은 오고야 말았다. 나라의 녹을 받던 이들은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협력할 것인가, 묵인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아도 됐다. 그저 묵인만 하면, 그때까지 누리던 것을 그대로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이석영과 그의 형제들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다시 없을 선택을 한다. 누대에 걸쳐 쌓은 재산과 지위,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가 전체가 만주로 떠난 것이다.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렇다. 올해 6월 남산예장공원에 개관한 ‘이회영기념관’의 주인공인 우당 이회영 선생과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선생의 형이 바로 이석영 선생이다. 그러나 이석영 선생의 존재는 아는 이도 적을뿐더러, 걸출한 독립운동가로 이름 높은 두 동생의 명성에 가려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하긴, 그간 사회 각층에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이회영 선생조차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형편이니, 이석영 선생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 집안의 독립운동을 가능케 했던 숨은 기둥이자,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섯 형제의 둘째이자, 만주 지역 수많은 조선인을 독립투사로 길러낸 장본인이었던 이석영 선생을, 이제는 기억해야 한다.

 

저자 노항래는 어렵사리 선생의 기록을 모으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 약전 《그 뜻 누가 알리오!》를 펴냈다. 필자는 우당 이회영 선생을 존경하여 관련 책을 여러 차례 읽었으나 그때마다 이석영 선생의 존재는 스쳐 지나가듯 서술되어 자세히 알 기회가 없다가, 마침 이석영 선생 약전을 발견하고 무척 기쁜 마음으로 읽게 됐다.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그는 누군가의 형으로만 기억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물이다. 이 집안의 독립운동은 이석영 선생이 전 재산을 독립운동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기에 가능했다. 바로 그가 구한말 만석꾼 이유원 대감의 양자로 어마어마한 재산을 상속받은 당대의 손꼽히는 거부였기 때문이다.

 

이석영 선생은 1855년(철종 6년)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유승은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후일 이조판서에 올랐다. 위로는 형 건영이 있고, 아래로 네 명의 남동생 철영, 회영, 시영, 호영이 있는 여섯 형제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어릴 적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우나 첫 번째 부인과 20대 초 사별했고, 과거에 몇 차례 응시했으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헌헌장부에다 “잘생기고 반듯해서 이웃들이 가장 탐내하던 아들”이라는 전언이 있다. 여섯 형제의 우의가 장안에 소문이 날 만큼 좋아 모두가 부러워했다.

 

그가 서른 살이 되던 1885년, 삶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 영의정을 지낸 거물급 관료이자 한양 인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던 친척 이유원의 양자로 입적된 것이다. 생부 이유승은 아끼던 둘째 아들을 보내려 하지 않았으나, 이유원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양자 입적을 청원할 정도로 간절히 염원한 끝에 마침내 뜻을 이루게 되었다.

 

 

당대 최고 권력자의 양자로 입적된 그는 곧 조정에 출사해 관료 생활을 시작한다. 연로한 양부 이유원은 3년 뒤 세상을 떠났고, 양부의 재산은 대부분 이석영 선생에게 상속되었다. 이유원은 세칭 ‘가오실 대감’으로 불렸는데, 이는 양주(현재의 남양주) 가곡리의 옛 지명 ‘가오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양주 대부분이 이유원의 땅이었을 만큼 광활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였다.

 

구한말 10대 부자, 한양 3대 부자로 꼽히던 이유원의 재산을 상속받은 이석영 선생은 자연히 거부가 되었다. 관직 생활 또한 무난히 이어가며 고종의 측근 관료로 활약했으나 1894년 이후부터는 관직을 거부하며 칩거했다. 그리고 1904년 쉰 살의 나이로 모든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고, 이후에는 육영사업에 매진하며 후진을 양성했다.

 

그리고 1910년, 완전히 국권을 빼앗긴 뒤인 9월의 어느 날, 여섯 형제는 가문의 명운을 건 일생일대의 회의를 시작한다. 당시 그들은 명실상부한 대한제국 최고위급 사회지도층이었다. 여섯 형제 모두 크고 작은 관직을 맡았던 고종의 신하들이었고, 양반 학인으로 배우고 익히기를 게을리하지 않던 지식인이었다.

 

이 회의에서 여섯 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해 일가 전체가 만주로 떠나기로 결의한다. 일제의 눈을 피해 헐값에 처분한 재산은 약 40만 원, 1969년 《신동아》가 환산한 가치로는 약 600억 원이었다. 이 재산의 대부분은 이석영 선생이 소유하던 땅에서 나온 것으로, 그의 결단 없이는 마련할 수 없는 자금이었다.

 

 

마침내 1910년 12월 30일, 여섯 형제와 40여 명의 일가는 서울을 떠났다. 당시만 해도 그 여정이 20년이 넘는 긴 싸움이 될 줄은 미처 몰랐을 것이다. 이후 만주에서 여러 차례 고비를 넘겨 가며 조선인이 살 땅을 사들이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조선인 학교를 세운다. 이석영 선생은 이 모든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묵묵히 지원하며 힘을 보탰다.

 

(p.90) …이석영은 경학사 발기인 명단에 이상룡에 이어 두 번째로 기재되어 있다. 이때 이석영은 동생들에게 피력했다고 한다. “앞으로 나는 뒤에서 일하겠다. 앞에 나를 내세우지 않도록 하라. 무엇보다 내가 돈 가진 것을 알면 필경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우리의 대사를 그르칠 수가 있다.” 그 뒤부터 이석영이 도모하고 참여하는 일에서 재정은 이석영이 뒷받침하지만, 조직의 직위나 일은 동생들, 다른 지인이 맡게 된다. 이석영은 모든 단체나 운영체에서 후견자 역할만 충실히 할 뿐 나서지 않았다. 돈 가진 걸 드러내지 않고 대사를 그르치지 않기 위함이었다. …

 

그러나 그의 재산도 화수분이 아니었다. 10년 동안 각종 독립운동 사업에 자금을 아낌없이 쏟아붓자 만석 재산도 바닥을 드러냈다. 1920년 말, 점점 심해지는 일제의 만주 침탈로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고 민족학교 육영사업도 더는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이 무렵 이석영 선생은 고령에다 무일푼이 되어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p.132) …나이는 환갑을 훌쩍 넘었고, 몸은 병들었다. 무엇보다 더는 독립운동 사업을 벌이고 뒷받침할 재산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석영은 회영, 시영이 앞서서 독립운동을 벌이면 뒤를 돌보고 뒷받침하는 양상이었는데, 1920년 즈음부터는 사실상 일선에서 물러서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은 일들은 또 다른 이들, 후대들, 새로이 사업에 나서는 선각자, 독립운동가들의 몫이었다. 그의 때가 다 간 셈이었다. 그는 그로부터 14년여를 더 살다 갔다. 짧지 않은 날들이다. 그 14년을 추정해보면 느리고 길게 서산에 해가 지듯 그렇게 한 삶이 스러지는 시간이었다. 안타깝고 슬프고 숙연한 시간이다.

 

그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이회영 선생 또한 굶기를 밥 먹듯 했고, 도저히 생계를 이어갈 수 없어 아내는 국내로 들여보내고 아들과 딸은 보육원에 맡겨 길렀다. 임시정부를 지켰던 동생 이시영 선생 역시 국내에서 들어오는 독립운동 헌납금에 의지해 죽이라도 먹는 날과 굶는 날을 반복하고 있었다.

 

여섯 형제의 자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흥무관학교에서 보고 배우며 항일투사로 자라났고, 이석영 선생의 큰아들 이규준과 작은아들 이규서 역시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은아버지 이회영을 따라 위험한 항일결사조직에 복무하던 이규준은 1928년 북경 석가장에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p.148) 얼마 후 풍문에 석영의 아들 규준의 소식이 북경에 들이닥쳤다. 기둥 같은 장남이 비명에 갔다는 것이었다. 독립투쟁 과정에서 죽은 시신이라도 찾는 것은 사치였을까? 어디서 어떻게 적이 놓아둔 덫에 걸렸는지, 규준은 비밀 약속 장소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우민 심문조서 등 병사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역시 시신 수습과 장례가 죽음이라는 건 틀림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식 잃은 이석영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첫아들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남은 둘째 아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둘째 아들 이규서는 동생 이회영을 일제에 밀고하는 일에 가담해 버렸고, 결국 독립운동 동지들에게 1933년 처단되었다. 이석영 선생은 어떤 경로로든 그 죽음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끔찍이 아끼던 동생 이회영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아들, 그리고 그 하나 남은 아들마저 잃게 된 노인의 심정. 그 충격이 너무 컸던 것일까. 그는 1934년, 80살을 일기로 영면한다.

 

(p.167) 그리고 해가 바뀌어 갑술년 새해 벽두 음력 1월 4일 이석영은 곡절 많은 한 삶을 마쳤다. 그 자신 일생의 영화를 포기하고 아들들은 모두 독립운동이라는 커다란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비명에 가 절손된 이석영은 상해 프랑스 조계 허름한 집 다락방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조선에 남았더라면,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민족의 고통을 지켜보며 영달을 누리느니 모든 걸 버리고 맞서 싸우는 길을 택했다. 이 나라를 지켜내야 할 ‘내 나라’로 생각하는 진정한 주인의식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은 나라와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사회지도층으로서 책임을 졌고, 자신들이 가진 모든 걸 내놓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통감하기는커녕 자신이 누려온 것들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는 기득권층이 얼마나 많은가. 이들은 상류의 태도를 행동으로 보여준, 한국 역사에 보기 드문 진짜 상류층이었다.

 

 

이석영 선생이 이토록 풍상을 겪고 자손마저 절손된 것에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었는데, 마침 서평을 쓸 무렵 기적처럼 반가운 기사를 보았다. 이석영 선생의 잃어버린 증손녀를 찾았다는 기분 좋은 기사였다. 저자가 이 집안의 독립운동에서 여성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을 아쉬워했던 만큼, 이를 계기로 더 많은 기록이 발굴되어 이 가문의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졌으면 한다.

 

저자는 연구자들이 보기에는 많이 미흡할 것이며 자료조사 중 느낀 감동을 필력이 부족해 온전히 옮기지 못하였다고 겸양하였지만, 이석영 선생의 인생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의 서사, 관련 독립운동사까지 오롯이 복원해낸 저자의 노고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진정 가슴이 뭉클해지는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