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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음감의 소유자 세종을 도운 '박연'

[‘세종의 길’ 함께 걷기 79]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 

 

음악의 박연

세종 시대에는 주위에 인물이 많았는데 유독 그 시대에 인물이 많았던 것인가 아니면 세종이 인물들의 능력을 북돋아 키웠는가는 논의해 볼 일이다. 즉 인물이 자랐느냐 인물을 키웠는가는 의문인데 유독 그 시대에만 인물이 있을 리는 없을 것이다.

 

유학(儒學)을 신념으로 세운 조선에서 중시한 것은 예와 악이다. 주희의 신유학에서는 예법을 법에 의한 사법(司法)보다 위에 두었다. 예법에는 국가나 개인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의 길례, 손님을 맞는 빈례, 혼인의 가례, 흉사 때의 흉례, 군사 행렬 시의 군례다. 이 중요한 개인, 나라에서의 행사에 수반되는 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국가를 마음으로 잇는 길이고 수단인 것이다.

세종 시대에 음악에 있어서는 박연이 눈에 띤다.

 

향악

음악을 정리하는 일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음악에서의 독창성 혹은 자주적인 음악세계를 찾는다는 것은 일반적인 발상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세종 12년 세종은 당시에는 혁명적인 즉 전통이며 그때까지는 정통이라 할 중국음악 즉 아악에 이의를 제기하는 혁신을 제안한다.

 

(아악 연주의 타당함 등에 대해 의논하다.)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아악(雅樂)은 본시 우리나라의 성음이 아니고 실은 중국의 성음인데, 중국 사람들은 평소에 익숙하게 들었을 것이므로 제사에 연주하여도 마땅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고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하물며 아악은 중국 역대의 제작이 서로 같지 않고, 황종(黃鍾)의 소리도 또한 높고 낮은 것이 있으니, 이것으로 보아 아악의 법도는 중국도 확정을 보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조회(朝會)나 하례(賀禮)에 모두 아악을 연주하려고 하나, 그 제작의 적중(適中)을 얻지 못할 것 같고, 황종(黃鍾)의 관(管)으로는 절후(節候)의 풍기(風氣) 역시 쉽게 낼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가 동쪽 일각에 위치하고 있어 춥고 더운 기후 풍토가 중국과 현격하게 다른데, 어찌 우리나라의 대[竹]로 황종의 관을 만들어서야 되겠는가. 황종의 관은 반드시 중국의 관을 사용해야 될 것이다. (《세종실록》12/9/11)

 

 

악기를 만드는 재료의 성질이 중국과 우리나라가 다른데 똑같은 방법으로 악기를 만들어 쓴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제기한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아악을 위해서 그 연주 악기는 원론대로 중국의 재료를 이용해 만들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나라 재료로 악기를 만들고 우리가 작곡한 음악을 연주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아서는 향악(鄕樂)을 듣고, 죽은 뒤에는 아악을 연주한다는 것이 과연 어떨까 한다.’ 고 의문을 제기한다. 맹사성이나 박연은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배운 대로 중국의 아악을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방금 《율려신서(律呂新書)》나 역대에 상고한 것도 많이 보았으나, 악기의 제도는 모두 그 정당한 것을 얻지 못하였다. 송나라의 악기도 또한 정당한 것은 아니며, ‘악공(樂工) 황식(黃植)이 조정에 들어와 아악을 연주하는 소리를 들으니, 장적(長笛)·비파(琵琶)·장고(長鼓) 등을 사이로 넣어 가며 당상(堂上)에서 연주했다.’ 하였으니, 중국에서도 또한 향악(鄕樂)을 섞어 썼던 것이다."

 

하니,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이 대답하기를, 사이사이로 속악(俗樂)을 연주한 것은 삼대(三代)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박연(朴堧)이 만든 황종(黃鍾)의 관(管)은 어느 법제에 의거해 재정(裁正)한 것인가." 하니, 맹사성이 아뢰기를, "송(宋)나라와 원(元)나라의 법제에 의하여 당서(唐黍) 1천 2백 개를 속에 넣어서 만든 것입니다." 하였다. (《세종실록》12/9/11)

 

마찬가지 논리로 지금 우리가 거서(柜黍, 빛깔 검은 기장)를 가지고 황종의 관을 만드는 것도 옳지 않은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거서가 그 성질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거서 1,200개로 음률을 정하는데 우리 서(黍)를 이용해 만들면 다른 악기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풍토가 다른 곳에서 자라는 재료를 써서 악기를 만들면 다른 소리가 나게 되는데 그러면 거기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향악의 의의는 거기에 있다. 박연은 세종과 함께 '보태평', '정대업' 등의 향악을 만들기도 했는데 후대 세조 이후는 아악을 대신하게 된다. 이로 궁중 음악에서도 중국 것이 아닌 우리 음악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신악

세종은 향악에 이어 우리의 음악을 만드는데 까지 진전하게 된다. 바로 신악이다. (14년 신악의 존폐 여부를 의정부와 관습도감에서 논의하게 하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이제 신악(新樂)이 비록 아악에 쓰이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조종(祖宗)의 공덕을 형용하였으니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의정부와 관습 도감(慣習都監)에서 함께 이를 관찰하여 그 가부를 말하면, 내가 마땅히 손익(損益)하겠다." 하였다. 임금은 음률을 깊이 깨닫고 계셨다. 신악의 절주(節奏)는 모두 임금이 제정하였는데, 막대기를 짚고 땅을 치는 것으로 음절을 삼아 하루저녁에 제정하였다. 수양 대군 이유(李瑈) 역시 성악(聲樂)에 통하였으므로, 명하여 그 일을 관장하도록 하니, 기생 수십 인을 데리고 가끔 금중(禁中)에서 이를 익혔다. 그 춤은 칠덕무(七德舞)를 모방한 것으로, 궁시(弓矢)와 창검(槍劍)으로 치고 찌르는 형상이 다 갖추어져 있었다. 처음에 박연에게 명하여 종률(鍾律)을 정하게 하였다. (《세종실록》31/12/11)

 

이러한 경험은 훈민정음 창제 후 세종 27년 정음을 이용한 〈용비어천가〉를  편찬하고 이것이 음악과 무용으로 이어지는 과업으로 매듭짓게 된다. 세종 31년 <취풍형> <여민락> <취화평> 등으로 신악을 연주하고 무용으로 이어진다.

 

절대음감 소유자 세종

박연이 일찍이 옥경(玉磬)을 올렸는데, 임금께서 쳐서 소리를 듣고 말씀하시기를, "이칙(夷則)의 경쇠소리가 약간 높으니, 몇 푼[分]을 감하면 조화)가 될 것이다." (《세종실록》31/12/11)

박연이 옥경을 만들었는데 가져다가 보니, 경쇠공[磬工]이 잊어버리고 쪼아서 고르게 하지 아니한 부분이 몇 푼이나 되어, 모두 세종의 말과 같았다. 세종의 음악에 대한 관심은 일찍이 세자 시절 부와 태종의 분부대로 “너는 평안히 즐기기나 하여라” (《태종실록》 13/12/30) 그리하여 서화, 화석(花石), 금슬(琴瑟, 거문고) 등 취미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자연스레 음악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었던 것이다. 세종의 소리에 대한 절대 음감을 갖고 있는 사실이 실록에도 나타나게 되었다.

 

 

박연(朴堧)은 영동(永同) 출생이다. 1405년(태종 5)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교리(校理)를 거쳐 세종이 즉위한 후 악사(樂事)를 맡아보았다. 당시 불완전한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세종 9년 편경(編磬) 12장을 만들고 자작한 12율관(律管)에 의거 음률의 정확을 기하였다. 특히 저[大笒]를 잘 불었고 고구려의 왕산악(王山岳), 신라의 우륵(于勒)과 함께 한국 3대 악성(樂聖)으로 추앙되고 있다. 지금도 고향 영동에서는 해마다 '난계음악제'가 열려 민족음악 발전에 남긴 업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