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겨우내 알몸으로 오들거리다
사색이 된 사시나무 무리들이
바람이 전하는 봄 희망에 젖어
휘파람으로 아우성인 우수 언저리
동장군에게 구속당해
두툼한 얼음이불 덮고 침묵 중이던
산골짝 웅덩이들이 해금되어
쩌렁쩌렁 살판났다
설렘으로 졸졸졸
자유 찾아 떠나는 물소리에
귀잠 깬 버들강아지도
꼬리가 제법 복슬복슬하고
권오범 시인의 ‘해토머리’란 시는 이처럼 겨우내 얼었던 대지들이 뜨뜻한 봄기운을 받아 몸을 녹이고 꿈틀꿈틀 되살아나는 자연과 초목과 동물들의 살판나는 분위기를 감칠맛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렇구나. 이번 주말이 봄비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우수(雨水)’렸다. 차가운 얼음덩어리에 눌려 숨도 못 쉬던 산골짝 웅덩이들이 살아나는 이 계절은 겨울은 아니고 봄도 아닌 어정쩡한 때이지만 우리 조상들은 이를 ‘해토(解土)머리’라고 불렀다.
땅이 풀리는 첫 계절이란 뜻이겠지. ‘따지기’라는 순수 우리말도 있네. 뭘 따진다는 게 아니라 따(땅)을 가두었던 얼음이 풀리면서 땅이 질척질척하는 때를 말한단다. 시기적으로는 우수에서 경칩 사이인 것 같고...
예전에 해토머리는 춥고 먹을 것이 모자라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필자의 성장기였던 60년대만 해도 아직 우리 경제가 굉장히 어려운 때였는데 다만 어리다 보니 그 실상을 게대로 알지는 못했는데 고려대 교수를 지낸 조지훈 시인이 1966년 4월에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을 보면
이 가난한 토양에서나마 푸진 가을을 염원하는 어설픈 일년지계(一年之計)가 기지개를 켜고 일어선다. 시달리고 쪼들린 살림살이에도 낙망하지 않는 순한 마음 위에 봄은 소생(蘇生)의 꿈으로 흥겨워진다. 메마른 산하가 초록빛으로 물들면 꽃은 또 예대로 난만하게 피어날 것이다....사랑하라 세월이여. 이 황토 기슭에 비바람이나 고르게 와서 풍성한 가을을 점지하기를!
이라며 가난한 춘궁기를 잘 이기고 올해도 풍년이 들어 사람들의 먹거리와 살림살이가 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만큼 당시 우리의 삶은 힘들었던 것인데, 우리가 수천 년 이어져 온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60년대와 70년대에 국가 주도의 경제발전 전략이 성공을 거둔 때문임을 우리가 알기에 그 당시 나라를 이끈 분들의 공로를 이때에 다시 기억해주고 싶다.
아무튼 봄은 오고 있다.
2월에는 각급 학교 졸업식이 열렸다. 당시는 서울이나 시골이나 운동장이 온통 흙밭이어서 학교 졸업식을 치르고 나면, 내 신발이며 바짓가랑이가 온통 벌건 황토로 범벅이 되었던 기억도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렇더라도 잠깐 내린 비에 언 땅이 촉촉이 젖어 들었는지, 어느새 길가 돌 틈 양지바른 곳에 작은 들꽃들이 피고 있고, 청춘의 기운을 받아 소년 소녀들의 볼이 발개진 것처럼 나뭇가지들의 끝은 윤기가 돌면서 볼그레하게 변해 있다. 긴 겨울을 뚫고 봄의 전령들이 올라오는 2월과 3월 사이. 마음은 이미 봄물이 담뿍 들었지만, 아직 햇볕 한 됫박은 더 있으면 좋을 이런 때에 우리는 진정한 봄을 더욱 기다리게 된다.
올 해토머리에는 곧 있을 선거 때문에 봄을 제대로 느끼게 될지 모르겠다. 그리고 정점을 지났다고 보고 싶지만 줄지 않는 확진자들로 해서 우리 마음이 펴지지 않는다. 더 조심해야 이 고비를 넘길 텐데 말이다.
이럴 때는 역시 시인들의 말을 듣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선거도 그렇고 올림픽 경기도 그렇고 이기고 지는 데에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있는 것 같지만 자연은 그것과는 별도로 돌아가니 자연을 보면 시간이 보이고 시간을 보면 삶의 방식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라면 이 봄, 초조하지 말고 느긋하게 시간을 관조하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리라.
삶이라는 것이
마냥 오를 수만은 없는 것이지요
때론 내리 길도 있는 것이고
바삐 가기도 하지만
잠시 멈추기도 하는 것이 삶
해토머리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
긴 호흡 한 번에 아지랑이 맞이하고
다시 긴 호흡 한 번에 새봄 맞으며
그렇게 쉬이 사는 것이지요
.... 이석구, ‘쉬이 사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