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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신분을 뛰어넘은 조선 으뜸 발명왕 -①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00]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귀화인 아버지를 둔 동래현의 노비

 

장영실의 삶은 부정확한 것이 많다. 이는 그의 출생 배경에서 비롯되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장영실의 부친은 원(元)나라 사람으로 소주(蘇州)ㆍ항주(杭州) 출신이고, 모친은 기녀였다고 전한다. 실상 부친이 관노가 아니었음에도 장영실이 관노가 된 것은 모친의 신분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시대 관기(官妓)들은 신분상 천민으로 조선 초기 엄격한 신분제도에 따라 관기의 딸은 관기가 되었고, 아들은 관노가 되었다.

 

다만, 부친이 원나라 출신의 귀화인이었다는 점은 좀 다른 점이다. 태조에서 세종대까지 조선 정부는 귀화인들의 정착을 위해 조선 여자와의 혼인을 주선하였는데 귀화인들과 혼인한 여성들은 대체로 관노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족(漢族) 혹은 족장과 같은 출신 배경이 좋은 귀화인들은 대체로 양인 여성과 혼인하였다. 따라서 장영실의 모친은 정실부인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장영실이 태종과 세종대에 살았던 인물이긴 하지만 정확히 태어나고 죽었을 때는 알 수 없다. 다만 《아산장씨세보》에 보면 장영실은 항주 출신인 장서(蔣壻)의 9세손이고, 부친은 장성휘(蔣成暉)로 고려 때 송나라에서 망명한 이후 줄곧 한반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귀화인인 셈이다. 이에 대해 부친인 장성휘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역적으로 몰려 어머니가 관노가 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장영실은 오늘날로 치면 다문화 가정 출신으로 장인(匠人), 장공(匠工)으로 과학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생애를 통한 활동을 보자.

 

 

생애

 

∙세종 7년 4월 18일(1425) : 평안도 감사에게 전지하기를, "석등잔 대ㆍ중ㆍ소 아울러 30개를 이제 가는 사직(司直) 장영실이 말하는 것을 들어 준비하라." 하였다

 

∙ 세종 14년 1월 4일 (1432) : 벽동군 사람 강경순(姜敬純)이 푸른 옥[靑玉]을 얻어서 진상하였으므로, 사직 장영실을 보내어 채굴하고, 사람들이 채취하는 것을 금지하게 하였다.

 

∙ 세종 15년 9월 16일(1433) : (안숭선에게 명하여 장영실에게 호군의 관직을 더해 줄 것을 의논하게 하다.) 안숭선에게 명하여 영의정 황희와 좌의정 맹사성에게 의논하기를, "행 사직(行司直) 장영실은 그 아비가 본래 원(元)나라의 소주(蘇州)ㆍ항주(杭州)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ㆍ계묘년 무렵에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 판서 허조와 병조 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라고 하고, 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라고 하여, 두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柳廷顯)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라고 하기에,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었다.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내 곁에 가까이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 자동물시계)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順帝)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한다."라고 하니, 희 등이 아뢰기를,

 

"김인(金忍)은 평양의 관노였사오나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호군을 특별히 제수하시었고, 그것만이 특례가 아니오라, 이 같은 무리들로 호군 이상의 관직을 받는 자가 매우 많사온데, 유독 영실에게만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세종 16년 7월 1일 (1434) : 새로 만든 누기(물시계)의 구조와 원리 및 보관 장소와 누기 명의 내용. 이날부터 비로소 새 누기(漏器)를 썼다. 임금이 예전 누기가 정밀하지 못한 까닭으로 누기를 고쳐 만들기를 명하였다. 파수용호(播水龍壺)는 넷인데,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수수용호(受水龍壺)는 둘인데, 물을 바꿀 때 갈아 쓴다. 길이는 11척 2촌이고, 둘레의 직경(直徑)은 1척 8촌이다. 살대[箭]가 둘인데, 길이가 10척 2촌이고, 앞면(面)에는 12시(時)로 나누고, 매시는 8각인데, 초(初)와 정(正)의 여분(餘分)이 아울러 1백 각이 된다. 각은 12분으로 나눈다. 간의(簡儀)와 참고하면 털끝만치도 틀리지 아니한다. 임금이 또 시간을 알리는 자가 차착(差錯, 어그러져서 순서가 틀리고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됨을 면치 못할까 염려하여, 호군 장영실에게 명하여 사신목인(司辰木人, 시각을 알려주는 나무 인형)을 만들어 시간에 따라 스스로 알리게 하고,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아니하도록 하였다.

 

 

∙ 세종 19년 7월 6일(1437) : 통사 김옥진(金玉振)을 시켜서 중국사람 지원리(池源里)와 김새(金璽) 등 7인을 요동으로 풀어 보냈다. 처음에 새가 야인에게 포로 되어서 오랫동안 북방에서 살았는데, 이때 이르러 도망쳐서 왔다. 새의 성질이 백공(百工)의 일에 정교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금은을 제련하여 주홍의 가벼운 가루로 하엽록(荷葉綠, 모자의 꼭대기에 다는 연잎 모양의 파란 장식물) 따위의 물건을 만들 수 있다.’ 하였다. 임금이 장영실에게 명하여 그 기술을 배우게 하였다

 

 

흠경각의 완성

 

∙ 세종 20년 1월 7일(1438) :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 이는 대호군 장영실이 건설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온 것이며, 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임금이 우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이에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제왕이 정사하고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서 세상에 절후를 알려줘야 하니, 이 절후를 알려 주는 요결은 천기를 보고 기후를 살피는 데에 있는 것이므로, 기형(璣衡)과 의표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이 일을 맡은 자에게 명하여 모든 의기(儀器)를 제정하게 하였는데, 대소 간의(大小簡儀)ㆍ혼의(渾儀)ㆍ혼상(渾象)ㆍ앙부일구(仰釜日晷, 오목해시계)ㆍ일성정시(日星定時)ㆍ규표(圭表)ㆍ금루(禁漏) 같은 기구가 모두 지극히 정교하여 전일 제도보다 훨씬 뛰어나 오직 제도가 정밀하지 못하고, 또 모든 기구를 후원(後苑)에다 설치하였으므로 시간마다 점검하기가 어려울까 염려하여, 이에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 한 간 집을 세웠도다.

 

∙ 세종 20년 9월 15일: 경상도 채방 별감 장영실이 창원ㆍ울산ㆍ영해ㆍ청송ㆍ의성 등 읍의 동철과 안강현의 연철을 바치다.

 

∙ 세종 24년 3월 16일(1442) :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 임금의 수레)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견실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 세종 24년 4월 27일: 조순생(趙順生)은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수레)가 견고하지 않은 곳을 보고 장영실에게 이르기를, ‘반드시 부러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으니, 모두 형률에 의거하면 곤장 80개를 쳐야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장영실에게는 두 등급을 감형하고, 임효돈과 최효남에게는 한 등급을 감형하며, 조순생에게는 처벌하지 않도록 명하였다.

 

∙ 세종 24년 5월 3일 : 임금이 박강ㆍ이순로ㆍ이하ㆍ장영실 등의 죄를 가지고 황희에게 의논하게 하니,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는 불경에 관계되니, 마땅히 직첩을 회수하고 곤장을 집행하여 그 나머지 사람들을 징계해야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장영실이 만들어 놓은 과학기기는 100여 년 뒤 명종 대까지 이어진다.

 

∙ 명종 4년 11월 24일 (1549): 동지에 동구와 혜정교에 있는 앙부 일구를 측후하다.

 

동지에 종묘의 동구(洞口)와 혜정교에 있는 앙부일구(오목해시계)로 관측하였는데 태양 행도(行度)가 동지의 획에도 모두 어긋났다. 간의대(簡儀臺)의 소규표(小圭表) 그림자 길이는 1장 4척 5촌 4분이었고, 대규표(大圭表) 그림자 길이는 7장 3척 4촌 1분이었다. 척 4촌 1분이었다. (장영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