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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이수를 끝까지 스승으로 모셔

세종의 스승 이수 - ②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05]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우여곡절의 일생

 

세종시대의 인물을 살펴보고 있다. 마음 착한 한 선비의 인간성이 일생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세종의 스승 이수(李隨, 1374년 공민왕 23~ 1430 세종 12)를 통해서이다. 한 선비 삶의 우여곡절이 녹아 있어서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다.

 

세종의 스승이다 보니 자연스레 부왕인 태종대부터 시작된다.

 

 

인품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아

 

“(대사성 유백순이 시독관으로 생원 이수를 천거하다.) 성균관 대사성 유백순(柳伯淳)을 불러 시학(侍學, 임금이나 왕세자에게 가르치고 문답하는 일) 할 만한 사람을 물었다. 임금이, "경이 오래 성균(成均)에 있었으니, 선비들의 우열을 알지 못함이 없을 것이다.’... 유백순이 생원 이수(李隨)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답고 학문이 정숙(精熟)하다고 천거하니, 임금이, "내가 시험하여 보겠다." 하였다. (《태종실록》 7/7/28)

 

그의 본성은 스승으로 모범이 될 만했다.

 

이에 임금 태종은 생원(生員) 이수(李隨)에게 옷 1벌[襲]을 내려 주었다. (《태종실록》 12/8/12)

 

 

관리로서 일하는 도중 실수도 저질러

 

“겸 상서소윤(尙瑞小尹) 변처후(邊處厚)와 주부(注簿) 이수(李隨)ㆍ직장(直長) 김종서 등을 의금부에 내려 태형 40대 대신 수속(收贖, 죄인이 죄를 면하려고 바치는 돈을 거두는 것)하고, 그 직(職)을 파면하였으니, 순패(巡牌, 순장이 밤에 궁궐이나 도성 안팎을 순찰할 때 차고 다니던 둥근 나무패)를 주는 데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태종실록》15/4/21)

 

그리고 태종 18년에 “직예문관(直藝文館) 이수(李隨)를 임금이 불러들이니, 이수가 일찍이 세자에게 글을 가르쳤으므로 장차 서연관(書筵官)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태종실록》 18/6/3)

 

 

세종은 그를 인정하고 정성으로 모셔

 

태종 이후 세종이 임금이 되며 여전히 스승인 이수에게 신뢰를 보인다. 장가가는 우부대언 이수에게 말 등을 하사한다.

 

“임금이 우부대언 이수(李隨)에게 안장 갖춘 말과 갓ㆍ신과 옷 한 벌을 하사하니, 이는 수가 장가를 들게 되었기 때문이다.”《(세종실록》즉위년/10/18)

 

그리고 세종 1년에는 이수를 명하여, 역마로 봉산(鳳山)에 가서 어버이를 뵙게 하고, 술과 밥을 내려 주었다.(《세종실록》1/4/26

 

이에 보답하듯 백성을 위한 위민(爲民) 정치 정신을 논하기도 한다.

 

(부락민이 고을 관장의 죄를 고하지 못하게 하는 법의 제정에 대해 논의하다.) “임금이 인정전에 나아가 조회 받고, 또 편전(便殿)에 나아가 정사를 보았다. 허조가 간절히 청하기를, "전날에 상서하였던바, 마을에 사는 백성이 그 고을 관장(官長)의 죄를 지은 것을 고하지 못하게 하여, 풍속을 두텁게 하는 법을 마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다시 참고해 보고자 함은, 이미 이루어진 법을 마음대로 함부로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니, 여러 의논이 분분하여 한결같지 않으나, 다만 이수(李隨) 혼자 말하기를,

 

"새로 고치는 것이 불가하니, 만일 마을 사람이 탐관오리의 잘못을 고하여 하소연하지 못한다면, 방자한 행동이 기탄이 없어서 그 해가 백성에게 미칠 것은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에게 아뢰던 일이 끝나매, 여러 신하에게 술을 다섯 순배 돌려 먹이고 경연을 끝냈다.”(《세종실록》1/6/21)

 

 

 

잠깐 권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게으름을 피워

 

“황해도 관찰사 이수(李隨)와 경력 하형(河逈) 등이 함부로 음탕하고, 법도가 없어서, 관기(官妓)를 거느리고 도내(道內)에 돌아다니면서 혹은 말을 나란히 타고 다니기도 하였다. 하형은 기생의 어미가 죽어도 집으로 돌아가 상을 치르지 못하게 하고, 이수는 체임(遞任)되는 날에도 기생을 이끌고 돌아왔다. 일이 발각되매, 헌부(憲府)에서 이를 탄핵하여 형(刑)에 처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수는 특별히 용서하고, 하형은 곤장 80대를 치고 그 직첩(職牒)을 회수하였다. 이수는 임금이 일찍이 그에게 배웠으므로, 시골에서 올라와 몇 해가 되지 않아서 벼슬이 재추(宰樞, 이품(二品) 이상의 벼슬)에 이르니, 조정과 민간에서 놀랍게 보았는데, 하루아침에 감사가 되매 함부로 음탕하고 마음대로 행동하여 나라의 법을 범하니, 식자(識者)들이 그를 비웃었다.” (《세종실록》4/2/29)

 

출세했다 하여 잠시 권력을 가지고 오만했던 이수의 모습도 보여준다. 그러나 정신마저 비뚤어져 일탈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은 한번 믿으면 끝까지 인정하고 믿으려 해

 

사람이 귀한 시대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책이고 움직이는 사전이 된다. 이어 다시 불러 북경으로 보내는 중책을 맡긴다.

 

(이발ㆍ이수를 북경에 보내어 부고를 전하고 시호를 청하게 하다.) “형조 판서 이발(李潑)과 좌군 동지총제 이수(李隨)를 북경에 보내어, 표전(表箋, 나라에 길한 일이나 흉한 일이 있을 때 써 올리던 전문)을 받들고 부고(訃告)를 전하고 시호(諡號)를 청하게 하였는데, 대행왕(大行王)의 행장(사람이 죽은 뒤 그 평생에 지낸 일을 기록한 글)을 가지고 갔다. 문무백관이 백의(白衣)와 오사모(烏紗帽)ㆍ흑각대(黑角帶)로 표전을 배송하였는데, 악기는 진열하였지만 연주하지 아니하였다.” 표에 말하기를 “신에 대한 하늘의 도움이 박하여 갑자기 재앙을 당했으니, 땅을 치고 하늘을 부른들 오장이 찢어질 뿐이로다. 멀리 황궁을 바라보고 예(禮)에 의하여 삼가 부고하노라." 하였다.(《세종실록》4/5/15)

 

세종 7년에는 사위를 맞은 이조 참판 이수에게 내구(內廐, 궁궐 안의 마구간)의 말 한 필을 주었다. (《세종실록》7/4/20)

 

세종 8년에는 중군 도총제를 제수받기도 한다. “정현(柳廷顯)을 좌의정으로, 황희(黃喜)를 이조 판서로, 허조(許稠)를 참찬으로, 이수(李隨)를 중군 도총제로, 박실(朴實)을 우군 도총제로, 유영(柳穎)을 한성부윤으로, 김소(金素)를 우군 동지총제로 임명하였다.”(《세종실록》8/3/17)

 

 

우연한 일로 삶을 마감해

 

처음에는 겸허했다. 그러다 넘치는 후의에 취했고, 잠시 이성을 잃었고 그러나 다시 제자리를 찾았으며, 선비로서의 백성에 대한 소신을 지키고 우연한 실수로 삶을 마감한다. 세종의 주위에서 세종을 도운 여러 선비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 같은 삶의 모습이다.

 

병조 판서 이수(李隨)가 졸하였다.

 

“정미년(세종 9년, 1427)에 어머니가 죽으매 상례(喪禮)에 부도(浮屠, 주검을 안치하여 세운 둥근 돌탑)를 쓰지 아니하였다. 복(服)을 마치고 다시 도총제가 되었다가 이내 이조 판서로 옮기고, 다시 병조 판서로 옮겼는데 술에 취하여 말을 달리다가 떨어져서 이내 죽으니, 나이는 57살이었다.” (《세종실록》12/4/17)

 

 

이수가 검소하게 지낸 증거는 죽은 뒤의 실록기사에서도 보인다.

 

“죽은 판서 이수(李隨)의 아내인 신씨(申氏)가 말씀을 올리기를, "일찍이 서울에서 환자 쌀 26석을 빌려 남편과 부모의 초상을 치르는 데 썼는데, 집이 가난하여 갚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에 계속 독촉받고 있사오니, 지방으로 나가서 주(州)의 창고에 바치게 하여 주소서." 하니, 임금은 그를 딱하게 여기어 징수하지 말라고 명하였다.(《세종실록》12/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