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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김란사, 독립운동과 여성교육에 목숨 바치다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 글‧그림 황동진, 초록개구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김란사!

언뜻 듣기에도 몹시 이국적인 이 이름은, ‘낸시(Nancy)’라는 세례명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김란사는 구한말 태어나 1919년 숨을 거둘 때까지, 조선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에 아낌없이 헌신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화학당의 교사로 많은 여성을 깨우치고, 또 고종의 비밀문서를 갖고 파리강화회의로 향했던 중요한 업적에 견줘 오늘날 거의 아는 이가 없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아마 파리강화회의로 향하던 중 베이징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아까운 삶을 일찍 마쳤기 때문이리라.

 

이 책,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의 지은이 황동진은 서울교육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로 활동하는 그림작가다. 2017년 김란사 특별전을 기획하고, 전시가 끝나서도 김란사를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펴냈다.

 

 

김란사는 1872년, 평양의 한 유복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청나라에 오가며 무역한 덕분에 남부러운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에는 혼인을 10대 시절에 일찍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녀는 스물한 살에 경무청에서 일하던 하상기와 혼인했다.

 

여느 여성들과 다르게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 일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그녀는 혼인 뒤 남편의 배려로 본격적으로 학구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 혼인한 여성은 받아주지 않는 이화학당의 규율을 알고 있었지만, 공부가 매우 하고 싶어 스크랜턴 학당장을 찾아가 몇 번이나 사정했다. 그러나 스크랜턴 부인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p.33-34)

어느 날,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이화학당으로 향했다.

“부인, 오늘은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왔습니까?”

...(줄임) 늦은 밤이라 탁자 위에는 늘 그렇듯이 등불이 켜져 있었다. 나는 등불을 힘차게 불어서 껐다. 방 안은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놀라서 잠시 숨을 죽이던 학당장이 외쳤다.

“뭐 하시는 겁니까?”

“지금 이 방이 어두운 것처럼 배우지 못한 나의 인생도, 이 나라의 미래도 어둡습니다. 장차 나라를 이끌 아이들이 제대로 배우려면 어머니가 먼저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도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꺼진 등에 불을 켜게 해 주세요!”

 

이런 그녀의 열의는 마침내 학당장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녀는 꿈에 그리던 학생이 되었다. 세례를 받고 ‘Nancy’, 곧 ‘란사(蘭史)’라는 이름을 받은 것도 그때였다. 배움에 목마르던 그녀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이화학당에서 공부를 마치자 남편은 자신과 함께 게이오대에 가서 적국 일본을 더 공부하고 돌아오자고 했다. 그녀도 공부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의기투합한 그들은 게이오대에서 함께 유학생활을 했다. 부부는 날마다 독립신문을 읽고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럴수록 두 사람이 느낀 것은 나라의 미래가 교육에 달렸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녀에게 미국에 가서도 공부할 것을 권했다. 앞으로 조선이 강해지려면 여성들을 이끌 지도자가 필요한데, 아내가 그 일을 누구보다 잘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p.52)

“너무 걱정 말래도 우리나라 여성을 대표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다녀오세요. 돌아오면 할 일이 많을 겁니다. 당신은 내 부인이자 원옥이 엄마로만 살기엔 아까운 사람이에요. 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해야 합니다.”

 

마침내 그녀는 더 넓은 세상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먼저 워싱턴에 있는 하워드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오하이오주에 있는 웨슬리언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1906년 귀국했다. 그동안 나라의 상황은 더욱 악화하여 있었고, 그녀를 찾는 곳은 많았다.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자신의 모교인 이화학당에서 교편을 잡으며 여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어느새 백발의 할머니가 된 스크랜턴 부인이 조선 여성들의 교육은 이제 조선 사람이 해야 한다며, 김란사를 이화학당 교사로 초빙한 것이다. 그녀가 가르치던 학생들 가운데는 유관순도 끼어 있었다.

 

그녀는 고종 황제의 영어통역관으로도 활약했다. 영어가 능통했던 그녀는 순헌황귀비(엄귀비, 황태자 영친왕을 낳았다.)도 만나며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누누이 일깨웠고, 그 덕분에 순헌황귀비의 도움으로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

 

이런 활약상이 늘어갈수록 점점 김란사 부부는 주의할 인물로 조선 총독부에 찍혀 감시가 삼엄해졌다. 그러나 이 무렵 그녀는 고종 황제로부터 일생일대의 밀명을 받게 된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가서 세계 여러 나라 대표들 앞에서 대한 제국의 독립을 요청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란사는 기꺼이 응했다. 엄청난 위험이 따르는 임무였지만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돌아오지 못했다. 베이징을 거쳐 파리로 갈 계획이었지만, 베이징에서 한 동포가 주최한 만찬에 참석한 이후 갑자기 의문의 죽임을 당한 것이다.

 

(p.112-113)

김란사는 1919년 3월 10일,

베이징에 있는 한 병원에서 마흔일곱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에 참석한 남편 하상기와 한 선교사는 김란사의 몸이 검게 변해 있었다고 했다.

하상기는 김란사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밝히려다 일본 경찰에 구속되었고,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 김란사가 죽은 그 이듬해에 목숨을 잃었다.

1995년 8월 15일 김란사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18년 4월 4일에는 국립현충원에 위패가 안장됐다.

 

이렇듯 그녀의 죽음은 황망한 것이었다. 아마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할 뿐 지금도 정확히 밝혀진 내막은 없다. 어둡던 조선에 등불을 밝히던 한 여성 선각자가 이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것은 조선으로써도 크나큰 손실이었다.

 

갑자기 황망하게 간 탓인지, 아직도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김란사라는 이름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미국에서 남편의 성을 따라 쓰는 문화에 따라 ‘하란사’로 불리던 것이 와전되어 이름이 ‘하란사’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이 책은 김란사 전시를 기획했던 학예사가 쓴 책답게, 내용이 일목요연하면서도 누구나 읽기 쉬워 그녀를 이해하기 위한 책으로 손색이 없다. 누구보다 배움을 향한 열정이 강했던 김란사, 그리고 그 지식을 자신의 안위와 영달이 아닌 사회를 일깨우는 데 썼던 그녀의 열정을, 오늘날 우리가 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김란사에 대해 알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