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시인 연산군!
흔히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연산군에게, 시인이라는 표현은 좀 낯설다. 조선에서 글을 배운 선비라면 누구나 필수 교양으로 시를 짓곤 했지만, 임금은 좀 달랐다. 이성적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군주에게 감성적인 시 짓기는 그다지 권장되는 덕목이 아니었다. 그래서 임금이 어제시(御製詩)를 지을 때마다 신하들은 삼갈 것을 권하곤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달랐다. 그는 보위에 오른 뒤에도 80여 편에 달하는 어제시를 지을 만큼 시를 좋아했다. 그 내용은 대체로 감상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기애가 충만한 것들이었으나, 때로는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살벌한 시도 있다. 연산군은 자신이 지은 시를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 내리고, 승지들에게 답시를 지어 올리게 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 책, 《조선국왕 연산군》은 ‘88편의 시로 살피는 미친 사랑의 노래’라는 부제에 걸맞게 연산군이 남긴 88편의 시로 그의 내면에 흐르는 광기와 고독, 사랑을 보여주는 책이다. 소설과 해설을 절묘하게 섞어 쓰는 작가의 필력 덕분인지 재밌게 술술 읽힌다. 중간중간 들어가는 어제시가 연산군의 심리 상태와 광기를 잘 드러낸다.
연산군은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왕조 오백 년 역사상 가장 포악한 임금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10년 동안 왕위에 있으며 150명 이상을 죽였고, 천 명 이상을 간음했으며, 그 죽이는 방법도 잔인해서 사지를 자르고 뼛가루를 바람에 날리는 식이었다.
만약 연산군이 세자가 아니라 일개 종친으로 태어났다면, 그래서 왕위를 물려받지 않았다면 가무에 능하고 시를 잘 짓는 왕자로 오히려 칭송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내면에 흐르던 예술적 감수성이 광기로 변하면서 폭군의 길로 접어든다.
그 까닭으로는 우선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했던 점을 들 수 있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는 연산군이 여섯 살 때 아버지 성종에게 사사당했다. 연산군은 그 무렵 몸이 약해 신하 강희맹의 집에서 자라고 있었고, 돌아와서는 새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를 어머니로 알고 따랐다.
(p.229)
연산군에게는 광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는 역대 어느 임금보다도 단호했고 왕으로서도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왕권과 신권이 공존하던 시기에 신권을 무위로 만들고 철저하게 왕권을 행사했다. 실록을 꼼꼼하게 읽다 보면 성종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여실하게 느낄 수 있다. 연산군은 생모가 없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안정 속에서 성장할 수 없었다.
정현왕후 윤씨는 연산군에게 비교적 잘 대해주었지만 아무래도 생모의 사랑을 따라갈 순 없었고, 부왕인 성종은 자라는 내내 연산군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 성종은 연산군이 세자인지라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긴 했어도 딱히 아버지로서의 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때 사랑했던 여인의 자식이라는 측은지심이 있어 내치지는 못했고, 연산군 또한 폐세자 당할 만큼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어쨌든 어린 시절부터 세자 교육을 받고 자라난 ‘준비된 임금’이었으니 어쩌면 성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임금 역할을 잘할 수 있었겠지만, 주변에 간신이 들끓었던 것 또한 문제였다. 대표적으로 임사홍과 임숭재 부자는 연산군을 타락시켜 가문의 잇속을 차린 장본인으로, 지금까지도 간신의 대명사로 회자하고 있다.
이런저런 원인이 겹쳐 연산군은 갈수록 포악해졌다. 즉위 초기에는 단호한 일처리로 꽤 괜찮은 군주의 면목을 보이기도 했으나, 한마디로 그의 품성은 임금의 재목은 되지 못했다. 지나치게 예민한 감수성, 오만함, 교활함 등이 폭력성과 결합하여 희대의 폭군이 탄생했다.
(p.254-255)
효(孝)와 의(義)를 다 가져야 선왕의 규범에 맞고
사(邪)에 끌려 교(巧)를 부리면 세상이 흠으로 친다
만약 오늘의 조의에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서릿발 같은 칼날 아래 죽음을 면치 못하리
연산군의 어제시에서 피냄새가 느껴진다. 왕명에 저항하는 자는 서릿발 같은 칼날 아래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어제시이다.
책은 반정이 일어나면서 연산군이 몰락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연산군과 왕비 신씨 사이의 네 아들은 모두 처형당했고,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 바닷가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다 1년도 되지 않아 죽었다. 그가 죽으면서 남긴 말은 “신씨가 보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신씨는 연산군이 죽고 나서 30여 년을 더 살다가 1537년 연산군 옆에 묻혔다.
연산군이 선정을 베풀었다면 그가 남긴 어제시도 상당한 평가를 받았을 텐데, 그의 시는 이제 내면에 가득했던 자기애와 불안함, 폭력성을 투영하는 증표로 남았다. ‘나라를 감상적으로 다스리지 말라’는 뜻에서 시 짓기를 만류했던 신하들의 권고를 따라 내면에 흐르는 광기와 고독을 잘 다스렸다면 어땠을까. 출발은 그리 나쁘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어쩌다 폭군’이 된 연산군의 말로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