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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보행자 안전성이 배려되는 ‘보차공존도로’

손원표 길 문화연구원 원장이 펴낸 《보차공존도로》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15]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손원표 길 문화연구원 원장이 《보차공존도로》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런데 ‘보차공존도로’가 무엇일까요? 보행자와 자동차가 공존하는 도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자동차 전용도로나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이 아닌 이상, 도로에 보행자와 자동차가 공존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언뜻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 공존하는 보행자와 자동차 가운데 그동안 누가 우선이었습니까? 자동차가 우선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한 번 따져봅시다. 원래 길의 주인은 사람 입니다. 그러다가 자동차가 발명되고 그 자동차가 점점 속도를 높여가면서 사람은 점점 길에서 밀려났습니다. 정책도 어떻게 하면 자동차가 신속히 이동할 수 있느냐에 집중이 되었지, 사람의 안전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래서 차도와 보도의 구분이 없는 도로에서 사람은 자동차의 눈치를 보며 다녀야 했고, 자동차는 사람이 비키지 않으면 아무 거리낌 없이 경음기를 빵빵 눌러댔습니다. 그리고 아무 눈치도 안 받고 여기저기 자동차를 주차하여, 사람들은 이런 자동차를 피해서 다녀야 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심해지면 반동이 오는 법. 사람들은 점차 도시 길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사람인데, 이거~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970년대에 네덜란드 델프트시에서부터 빼앗긴 도로를 찾아 오자는 운동이 일어나, 시민들은 길에 철주나 화분, 돌 등을 놔두면서 빼앗긴 도로를 찾아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당국은 1976년 도로교통법에 이를 법제화하여 시민들의 운동을 뒷받침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럽보다는 늦었지만, 손 원장 같은 분들이 주축이 되어 이런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2019년 ‘교통정온화시설 설치 및 관리지침’이 제정되었으며, 2020년에는 ‘도로의 구조, 시설 기준에 관한 규칙’에 교통정온화시설의 설치 근거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손 원장님이 그동안 벌인 운동의 결과물로 낸 책이 바로 이 《보차공존도로》입니다. 그동안 낸 《자연과 역사, 문화가 깃들어 있는 길》이나 《지속 가능한 길, 그 속에 깃든 모습들》이라는 책들이 이러한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산문 성격이 강한 글이었다면, 이번 《보차공존도로》는 그동안의 연구 결과물을 책으로 엮은 이론서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 같은 일반인이 보기에는 딱딱한 책이지만, 그런데도 책을 관통하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도로’ 그 정신만은 오롯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책은 보차공존도로의 핵심인 교통 정온화(交通靜穩化, Traffic calming)에 대해 네덜란드, 영국, 일본, 독일, 미국의 교통정온화 사업을 살펴본 뒤, 한국의 교통정온화 사업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교통정온화 기법과 한국형 교통정온화의 정립 방안에 대해 논의합니다. 참! ‘교통 정온화’를 한자와 영어로도 표기해놓았지만, 그래도 일반인에게는 그 개념이 선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자동차라고 하면 ‘빠르다’, ‘난폭하다’ 등의 개념이 먼저 떠오르지요? 쉽게 말해서 교통 정온화는 이런 빠르고 난폭한 자동차를 진정시키는 것입니다. 흥분한 사람을 진정시키려고 할 때, 영어로 ‘calm down! calm down!’ 하지 않습니까? 자동차를 진정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속도를 늦춰야겠지요. 그리고 함부로 보행자의 공간으로 불쑥불쑥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되겠지요?

 

교통 정온화 기법은 바로 이러한 기법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리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겠지요? 예! 과속방지턱, 회전교차로, 노면요철 포장 등이 그런 시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제한속도 설정, 어린이ㆍ노인 보호구역 설정 등은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구요. 책을 보니 그 밖에도 시케인, 고원식 교차로 등 다양한 기법이 있네요.

 

그런데 손 원장님은 교통 정온화를 해야 한다니까, 정확한 개념 이해도 없이 시설을 설치하여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키는 예도 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과도한 시선유도등 설치로 오히려 심리적, 시각적 부담감을 주거나, 차량 통행을 차단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 곧 ‘볼라드(bollard)’로 인해 오히려 사람이 다치는 예도 있다고 합니다. 저도 전에 다른 데를 쳐다보며 보도를 걷다가 앞에 설치된 낮은 볼라드를 보지 못하고 이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어서면서 제 입에서는 ‘씨바씨바’ 소리가 나오고요.

 

손 원장님은 ‘보차공존도로’는 보행자와 차량이 함께 사용하는 도로이지만 보행자의 안전성이 더 배려되는 도로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렇지요. 덩치 크고 빠른 자동차와 약한 보행자가 공존하려면 보행자의 안전성을 더 배려해야겠지요. 그러기 위해선 차량 중심에서 사람 중심으로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손 원장님은 더 나아가 여기에 자연을 끌어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길이 들어서는 지역의 역사성, 문화, 전통까지 생각합니다. 손 원장님으로 인하여 길은 단순한 도로에서 하나의 문화로 차원이 달라지는군요. 그러나 공무원들의 인식이 아직 여기까지 따라오지 못하고, 따라온다는 것도 종종 전시성(展示性)에 그치는 경우가 많으니... 이를 안타까워하는 손 원장님의 얼굴에서 함박웃음이 퍼져나가는 성숙한 길 문화의 시대가 빨리 와야 하겠습니다.

 

손 원장님은 이러한 길 문화의 시대를 생각하며, 책의 7장에서는 빌리지 존(villiage zone) 사업에 대해, 8장에서는 인간 중심의 도로로서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유니버셜 디자인, 유-에코로드(U-Eco Road)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한글을 사랑하는 저로서는 이런 외국어가 그대로 사용되는 것이 좀 아쉽기는 하지만, 어쨌든 손 원장님 덕분에 길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무심코 길로 다녔고, 또 운전대를 잡으면 보행자보다 차를 우선하는 심리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손 원장님 덕분에 인간 중심의 도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 수 있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고, 저에게 길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손 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