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훈민정음 자모, 천지 만물의 이치로 만들어

공학박사의 한글 이야기(7)

[우리문화신문=신부용 전 KAIST 교수]  훈민정음은 성리학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필자는 부끄럽게도 그간 공학도라는 핑계로 성리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크게 관심 두지 않았으며 그래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중고교 국어 시간에 제대로 배웠으면 기억이라도 날 텐데 그런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이 성리학의 원리로 만들어졌다는 말에 그저 하는 소리이겠지, 당시 학자들은 모두 성리학에 빠져 있었으니 뭐든 성리학과 연관 지었겠지, 더구나 중국이 우리 고유의 문자를 만드는데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볼 것을 걱정해 성리학을 내세웠겠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독자들께서는 제대로 아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미 다 잘 아신다면 필자를 꾸짖어 주시고 혹시 그렇지 못하시다면 이 글을 읽으며 같이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틀린 말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꼭 제게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함께 토론하여 옳은 방향으로 나가도록 하십시다.

 

훈민정음 예의편 제자해(制字解)에 보면 ‘천지의 이치는 하나의 음양과 오행뿐이니. (가운뎃줄임) 사람의 말소리도 다 음양의 이치가 있는데 다만 사람들이 살피지 못할 따름이다. 이제 훈민정음을 만든 것도 애초부터 지혜로 경영하고 힘써서 찾은 것이 아니요, 다만 그 말소리에 따라 이치를 다 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훈민정음은 말소리에 새겨져 있는 음양과 오행의 이치를 찾아낸 것이지 인간의 지혜로 창작해 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천지의 이치는 하나의 음양과 오행뿐이라는 것은 송나라 때 발전된 성리학의 기본 이론이며 성명(性命)과 이기(理氣)를 설명하는 유교 철학이라 합니다. 성명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성품이고 이기(理氣)는 천지 사이에 나타나는 불변의 법칙(이-理)과 현상(기-氣)을 말한다고 합니다.

 

요컨대 성리학은 인성과 천리(天理)와의 관계를 논한 중국의 학문으로 쉽게 말하면 세상만사의 모든 이치를 설명하는 철학으로 당시 집현전 학자들은 모두가 수준 높은 성리학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만사를 성리학으로 해석하였으므로 말소리도 성리학으로 풀어나갔던 것입니다. 마치 기독교들은 세상 모든 것을 하느님이 창조하였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기저에 깔린 근본적인 원리를 찾아내면 그 원리로 다른 세세한 것까지 분석해 내는 것은 학문의 세계에서 늘 보아 온 것입니다. 예를 들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은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크기를 해석하여 간단한 수식으로 나타내었는데 이 수식으로 지구상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복잡한 역학문제들을 풀어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목소리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니만치 성리학으로 풀어내 글자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그것이 28글자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훈민정음은 애초부터 지혜로 찾은 것이 아니고 그 말소리의 이치를 찾아냈을 따름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 뜻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자음 28자가 발성되는 형상을 본떠서 만든 것도 성리학의 적용이고, 초성 17글자가 어금닛소리(牙), 혓소리(舌), 입술소리(脣), 잇소리(齒), 목구멍소리(喉)의 다섯 갈래의 소리로 나뉘는 것도 성리학에서 말하는 5행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나아가서 ‘어금니는 착잡(錯雜)하고 기니 오행의 나무(木)요, 혀는 날카롭고, 움직이니 불(火)이고, 입술은 모나고 합해지니 흙(土)이고 이(齒)는 단단하고, 부러지니 쇠(金)요 목구멍은 깊숙하고 젖어 있으니 물(水)이다.‘라고 해석합니다. 나무는 불을 만들고 불에 타면 흙이 되고 흙은 굳어서 쇠가 되며 쇠는 물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물은 다시 나무를 만들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돌고 도는 것이라 합니다. 이런 원리에 의해 아설순치후와 17자음의 순서도 정해지는 것이라 합니다.

 

    ▲ ‘ㅋ, ㄲ’ 발음을 위해 ‘ㄱ’을 발음할 때보다 혀뿌리를 높여 주는 모습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Veda)는 산스크리트어로 전해 내려왔는데 이를 기록하는 데바나가리라는 문자는 6~7세기에 성숙하였다고 합니다. 이 문자도 훈민정음처럼 자음 발생의 5개 부위를 인식하고 이로부터 34개의 자음이 발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이 시기적으로 보아 성리학을 적용했을 리는 없으며 5개 발성 부위도 성리학에 따른 훈민정음의 아설순치후가 아닌 아치설후순의 순서를 보입니다. 이 순서가 어떤 원리로 정해졌는지는 몰라도 우리 자음처럼 자연의 순리에 의해 결정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위는 자음에 관한 특성과 순서를 ‘음양5행설’로 풀어 정했음을 보인 하나의 예이고 이 밖에도 다른 응용사례를 여러 가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령 하나의 음절이 초ㆍ중ㆍ종성으로 이루어진다든지, 모음의 기본이 천지인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주역》과 《중용》에서 강조된 천지인 3재의 개념에 의한 것입니다. 이는 하늘이 열리고(天開) 지구가 형성되어(地成) 인간이 천지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한다(人生)는 사상입니다.

 

우리가 늘 쓰는 손말틀(휴대전화)의 천지인 자판에는 기본 모음 3글자 ‘ㆍ, ㅡ, ㅣ’이 쓰이는데 이 가운데 첫 글자 · (통상 ‘아래 아’라 부르지만)는 현재 쓰고 있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이 쓰던 글자로 하늘을 가리킵니다(하늘 아). 그리고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아무런 생각 없이 내뱉는 소리로 ‘아’ 도 아니고 ‘어’도 아니며 ‘오’도 아닌 기본적인 소리입니다. 영어 coffee[|kɔːfi;]의 발음 중 ‘ɔ’ 에 가까운 소리입니다. 이것이 ‘ㅡ’ 나 ‘ㅣ’ 와 결합하여 ㅏ, ㅓ, ㅗ, ㅜ 등 다른 모음을 만들어 내고 있으므로 가장 기본적인 모음이라 할 것입니다. 이 또한 하늘을 뜻하는 글자에 걸맞은 역할을 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훈민정음의 자모는 점 하나, 획 하나가 예외 없이 모두 천지 만물의 이치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보고 집현전 신하들이 훈민정음해례 제자해(制字解)에서 하늘이 임금님의 뜻을 열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라 감탄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번에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대개 어떤 경로를 거쳐 오늘날의 한글로 변신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