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22 (월)

  • 흐림동두천 24.8℃
  • 흐림강릉 32.9℃
  • 서울 26.7℃
  • 흐림대전 31.0℃
  • 구름많음대구 33.2℃
  • 구름많음울산 31.5℃
  • 구름많음광주 30.8℃
  • 구름많음부산 29.2℃
  • 흐림고창 31.2℃
  • 구름많음제주 32.0℃
  • 흐림강화 26.4℃
  • 흐림보은 30.3℃
  • 흐림금산 31.4℃
  • 구름많음강진군 30.9℃
  • 구름많음경주시 33.5℃
  • 구름많음거제 28.2℃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앵무새가 된다는 것은

붓다 “그대는 내가 마땅히 법을 설한 바 있다고 말하지 말라"
산사에서 띄우는 편지 3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앵무새는 신기하게 사람 말을 곧잘 따라 한다. 하지만 진정 사람들의 의사전달에 대한 의미와 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나 하는 걸까? 앵무새는 사람의 말을 따라 하므로 말 잘하는 사람을 흔히 앵무새 같다고 한다. 자기 주관 없이 말을 한다거나, 지조 없이 남의 말에 이끌려 그대로 조잘대는 경우를 이른다. 또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라는 말이 있다. 이 역시 ‘말이 무성하여 일을 그르치는 경우’에 쓰는 말이다.

 

선인들은 말을 적게 하고 실속 있는 말을 챙기라 했다. 그런데도 세상엔 자기 주관이 분명하지 않거나, 정체성이 없는 말을 앵무새처럼 옮겨 악성 뜬소문으로 확산시키는 일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말의 의미나 진실을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지껄이고 보자는 심리에 기인한다.

 

 

말이 많으면 혼탁하고 어지러워지지만 사노라면 말로써 승부를 가려야 하는 경우도 더러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로 기선제압을 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런데도 떠벌리는 사람을 만나면 뒤돌아서서 “입만 살았네,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떠다니겠다, 말 못 하고 죽은 귀신은 없다.”라는 등의 말로 이들을 흉보기도 한다.

 

한편, 분위기 파악을 잘하여 간결하면서도 품위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존경심마저 드는 때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회사나 공무원 취업을 하기 위한 과정에서 ‘면접’은 매우 중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회사의 대표라든가 단체장 또는 법정이나 정치판, 더 나아가 성직자들에게 역시 신중하고 품격있는 말을 기대하게 된다. 이러한 ‘말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한때는 어린이 대상 ‘웅변학원’이 호황을 누리던 때가 있었다. 요즘은 남녀노소를 불문한 ‘스피치 학원’이 성행하고 있다. 나쁜 현상은 아니지만 ‘웅변’이라든가 ‘스피치 학원’은 언어의 기술적인 면만 강조하는 느낌이 든다. 문제는 번지르르한 기술이 아니라 진정성 있는 말의 내용일 것이다.

 

가끔 접촉사고로 차량을 갓길에 세워놓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광경을 목격한다.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삿대질하며 말다툼한다. 싸움을 지켜보노라면 목소리가 크거나 말 잘하는 사람이 이긴다. 요즘이야 블랙박스가 있고, 보험사에서 사건을 해결해 주기 때문에 그런 폐단은 줄었지만, 말은 뒷전이고 다짜고짜 주먹을 휘두르는 과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말이란 항상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말을 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말 가운데는 속임수나 권모술수가 있을 수도 있고, 남을 이롭게 편하게도 하지만 때로는 힘들고 고통에 빠지게 할 수 있어 조심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말로써 남에게 이익이 되게 하고, 슬기롭게 말을 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할 수 있을까를 늘 고민해야 한다. 말을 잘하되 내가 내뱉는 말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고, 상대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둘 일이다.

 

붓다의 말씀 가운데 “수보리여! 그대는 내가 마땅히 법을 설한 바 있다고 말하지 말라.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법을 설한 바가 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며, 내가 설한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금강경 제21분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라는 대목이 있다.

 

붓다는 자신이 수많은 경을 설해 놓고도 설한 법이 없다고 했다. 이를 풀이해 보면, 일체 모든 법이라고 하는 단어 자체가 사람이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언어일 따름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붓다는 일체 만물이 인연에 따라 생멸하는 자연 현상을 보고서 느끼고, 깨닫고, 알았던 것이지 결코 어떤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여 '내가 설한 법도 없다'고 하였을 것이다.

 

예수는 골고다 사형장에 가기 전날 저녁 제자들과 마지막 작별 만찬을 했다. 그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남긴 최후의 고별인사는 감동적이다. <대승복음서(마가복음서의 모체)>에 따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누구든지 ‘내가 곧 길이요 생명이라’라고 생각했다고 말하지 말라. 만약 어떤 이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다고 전한다면, 그는 곧 나 예수를 비방하는 자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처럼 예수는 ‘말조심’을 당부했다. 예수의 깊은 사색과 철학을 모른 채 말을 옮기는 일의 무모함을 예수는 일찍부터 알아차렸다. 성인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일은 바람직하지만, 그 깊이를 모르고 지껄일 때는 ‘앵무새의 말’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가르침을 주었다 한들 가르쳤다 하겠느냐.

내가 천지를 창조했다 한들 창조했다 하겠느냐.

내가 진리라고 말했다고 한들 진리 일 수 있겠느냐.

순간순간 지나가고 변하는 것이 진리라고 하겠느냐.

이 또한 지나갈 뿐!.

진실이 아닌 진실을 왜곡하여 진리를 삼고 진리라고 외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앎이란? 앵무새가 되지 않는 것이다.

                                                     - 일취 시편 <앎>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