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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집현전,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하다

세종시대를 만든 인물들 -⑱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25]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을 살피고 있다.

 

집현전과 ‘집단 지성’ ①

 

지금까지 2021년 6월 황희 영상을 시작으로 세종의 시대를 꾸민 50여 명 학자와 문인들을 다루어 왔다. 인물 탐구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기로 하며 마지막으로 조력자들의 집단이었던 두뇌집단인 집현전을 다루어 본다. ‘집현전’이란 세종 시대 이루어진 연구 집단으로 한국 으뜸 ‘집단지성’이라 할 것이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集團知性]이란 집단적 지성이나 지적 능력의 결과로 얻어진 집단적 능력을 일컫는 말이다. 다수 개체가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되는 지적 능력의 결과로써 개체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집합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집현전은 세종 때 궁중에 설치한 학문연구 기관이다. 고려 시대에도 있었지만 이름뿐이었고, 세종 2년(1420)에 세종이 실질적인 학문연구 기관으로 만들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를 도왔고, 여러 가지 종류의 책을 만들어 내는 등 세종 때의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집현전의 기능

 

1392년(조선 태조 1) 7월에 제정된 관제에 따르면 고려의 제도를 따라 보문각(寶文閣)ㆍ수문전(修文殿)ㆍ집현전(集賢殿)이 그대로 존치되어 있었으나,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집현전을 확대하여 실제의 연구 기관으로 개편하였다(세종 2년, 1420). 그 직제는 영전사(領殿事:정1품) 2명, 대제학(大提學:정2품) 2명, 제학과 부제학, 직제학, 직전(直殿) 응교(應敎), 교리(校理), 부교리, 수찬(修撰), 부수찬, 박사, 저작 정자(正字)가 있었다. 그 인원은 몇 차례 변경되면서 운영되었으며 세종 18년에는 20명으로 확정되었다.

 

 

집현전은 학자양성과 학문연구를 위한 기관이었다. 집현전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가)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경연은 임금과 신하가 경서와 사서를 강론하는 자리로 국왕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서연은 임금이 될 세자를 교육하는 것이다.

 

나) 집현전관은 외교문서 작성도 하고 과거의 시험관으로도 참여했으며

 

다) 집현전이 궁중에 있고 학사들이 문필에 능하다는 이유로 그들 가운데 일부는 사관(史官)의 일을 맡았다.

 

라) 그리고 중국 고제(古制)에 관하여 연구하고

 

마) 편찬사업을 하는 등 학술사업을 주도했다.

 

세종은 학사들의 연구에 편의를 주기 위하여 많은 책을 서거나 인쇄하여 집현전에 보관하는 한편, 재주 있는 소장 학자에게는 사가독서(賜暇讀書, 장래가 유망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의 특전을 베풀었다. 이로써 수많은 뛰어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하여 배출될 수 있었다.

 

바) 세종 20년대부터 집현전은 정치적인 역할도 하게 된다. 세종은 1442년에 첨사원을 설치하여 세자가 서무를 처결하게 하였다. 이때 첨사원의 관원 후보로는 서연관이 가장 유리하였는데 서연관은 모두 집현전관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집현전관은 첨사원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세종 25년(1443)부터는 세자의 섭정이 이루어졌으므로 집현전관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종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집현전관의 정치기관으로의 진출이 늘어났다.

 

이곳에서 이룩한 업적은 학문연구와 편찬사업 등이다. 편찬사업으로는 《고려사(高麗史)》, 《농사직설(農事直說)》, 《오례의(五禮儀)》,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삼강행실(三綱行實)》, 《치평요람(治平要覽)》, 《동국정운(東國正韻)》,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의방유취(醫方類聚)》 등의 많은 서적을 펴내 한국 문화사상 황금기를 이룩해 놓았다.

 

37년 동안 있었던 기관이지만 조선의 학문적 기초를 닦는 데 크게 공헌했으며, 많은 학자적 관료를 배출하여 세종 때뿐만 아니라 이 이후의 정치ㆍ문화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게 하였다. 뒤에 집현전과 같은 기능은 홍문관에서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1456년(세조 2) 단종(端宗) 복위를 꾀한, 후의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하여 반대파 인사가 집현전에서 많이 나오자, 세조(世祖)는 집현전을 폐지하는 한편 소장된 서적은 예문관(藝文館)에서 관장하게 하였다. (참고 : 두피디아)

 

 

집현전의 활동

 

실록에 나와 있는 자료를 중심으로 몇 활동을 보자.

 

집현전이 한 일을 일일이 거론하기에는 너무 방대하다 하겠는데 제도개선, 윤리의식고취, 법제, 농사, 의학, 천문, 수학, 군사, 외교, 인쇄, 음악, 수리 등 수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그 가운데 으뜸은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를 돕고 음운 체계를 정비한 일이라 하겠다.

 

(문신을 선발하여 집현전에 모으고, 무과 응시도 사서를 통달한 뒤에 하게 하다.) 좌의정 박은이 계하기를, "문신(文臣)을 선발하여 집현전(集賢殿)에 모아 문풍(文風)을 진흥시키시는 동시에, 문과는 어렵고 무과는 쉬우므로, 자제(子弟)들이 많이 무과로 가니, 지금부터는 《사서(四書)》를 통달한 뒤에라야 무과에 응시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옵소서." 하니, 임금이 아름답게 여기고 받아들였다. (《세종실록》1/2/16)

 

무과도 기본적인 인문 지식을 갖추도록 병행하게 제도를 개선했다. 전반적인 지식수준을 높은 시대를 만들어 가려 했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유사 10여 인을 뽑아 날마다 강론하게 하다.)

 

"일찍이 집현전을 설치하려는 의논이 있었는데, 어찌하여 다시 아뢰지 않는가. 유사(儒士,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 10여 인을 뽑아 날마다 모여서 강론하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1/12/12)

 

(구리판을 다시 잘 주조한 주자소에 술 120병을 내려 주다.) 주자소(鑄字所)에 술 1백 20병을 내려 주었다. 전자에 책을 찍는데 글자를 구리판[銅板]에 벌여 놓고 황랍(黃蠟)을 끓여 부어, 단단히 굳은 뒤에 이를 찍었기 때문에, 납이 많이 들고, 하루에 찍어내는 것이 두어 장에 불과하였다. 이때 이르러 임금이 친히 지휘하여 공조 참판 이천(李蕆)과 전 소윤 남급(南汲)에게 구리판을 다시 주조하여 글자의 모양과 꼭 맞게 만들었더니, 납을 녹여 붓지 아니하여도 글자가 이동하지 아니하고 더 바르므로 하루에 수십 장에서 백 장을 찍어낼 수 있다. 임금은 그들의 일하는 수고를 생각하여 자주 술과 고기를 내려 주고,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찍어내라고 명령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그 잘못된 곳을 교정하게 하였는데, 경자년(1420) 겨울부터 임인년(1422) 겨울에 이르러 일을 끝냈다.(《세종실록》 3/3/24)

 

당시 가장 중히 여겼던 지식의 집합체인 서적을 찍어내는 기술을 혁신적으로 개선하였다.(‘집단지성’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