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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정치를 편 ‘세종의 길’ 함께 걷기

정음청, 훈민정음 창제를 담당하는 기관

세종시대를 만든 인물들 - ⑲
[‘세종의 길’ 함께 걷기 126]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집단)을 살피고 있다.

 

 

집현전과 집단 지성②

 

세종 시대 이루어진 연구 집단으로 한국 첫 ‘집단지성’이라 할 집현전이 있다.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 集團知性]이란 다수의 개체가 서로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된 집단적 능력을 일컫는 용어다. 이는 개체의 지적 능력을 넘어서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전회에 이어 집단 지성으로서의 집현전의 몇 활동을 이어가 보자.

 

(영돈녕 유정현이 사직하고자 청했으나 허락하지 아니하다.) 유정현이 사직하는 글을 올려 아뢰기를, “신이 용렬한 자격으로 오랫동안 높은 벼슬을 더럽히고, 많고 후한 녹을 받으면서 처리하고 다스리는데 보람이나 효과가 조금도 없고 오히려 가물의 재앙을 부르게 되었나이다. 신은 나이 7순이 넘어 여러 가지 병이 몸에 얽혀서 기거하기도 불편하오니, 비옵건대, 신의 관직을 파면하시어 어질고 능한 이를 기다리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직집현전(直集賢殿) 정인지(鄭麟趾)를 시켜 정현의 집에 가서 사표를 도로 주고, 말하기를,

 

" ... 경은 사양하지마는, 나는 늙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 경을 내놓고서 누가 어질고도 재간이 있는 이가 되겠는가. 번거롭게 굳이 사양하지 말고 나의 소망에 맞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7/6/24)

 

이런 일 이후도 많은 사람이 일을 그만두려고 하나 세종은 그때마다 만류하고는 했다. 중세의 선비는 마치 살아있는 사전처럼 움직이고 있어 한 사람의 경험과 지식을 묻어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을 귀히 여긴 세종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집현전이 수행한 몇 가지 일

 

(안순이 수차 사용에 관해 아뢰다) 판서 안순(安純)이 아뢰기를, "지금 왜수차(倭水車)와 오치선(吳致善)이 만든 수차를 물에 부딪쳐서 시험해 보니, 왜수차는 논에 물을 대는 데 쓸 수 있고, 치선이 만든 수차는 우물물을 끌어 올리는 데는 쓸 수 있어도 논에 물을 대는 데는 쓸 수 없습니다. 왜수차는 농사짓는 데 매우 편리하고 유익하니, 청하건대, 공장(工匠)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서 만들어 쓰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 사람이 이를 만들어서야 다음 해 농사 때까지 미칠 수 있겠는가. 여러 도(道)에서 모형을 보고서 만들게 함이 옳을 것이다. 농사는 지극히 중대하니, 만약 대소 관리(大小官吏)들이 정신을 차려 농사를 권장한다면, 백성의 식량과 국가의 용도가 어찌 넉넉하지 못하다고 걱정하겠는가." 하니, 안순이 또 아뢰기를, "농업과 양잠은 중대한 일입니다. 옛적에는 대사농(大司農)이란 직책이 있어서 농업과 양잠을 오로지 맡았었는데, 지금은 전농시(典農寺)에서 다만 각 관사(官司) 노비의 신공(身貢, 노역 대신에 납부하는 공물)만 맡고, 농업과 양잠은 맡지 않으니, 옛날의 제도와 어긋난 점이 있습니다. 청하건대, 전농시에서 농업과 양잠을 오로지 맡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집현전(集賢殿)이 옛날의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13/10/30)

 

집현전에서 수차라는 농사 기구와 농업, 양잠에 관한 발전책도 마련하게 하였다.

 

 

(집현전에서 《삼강행실》을 펴내 서와 전문을 더불어 올리다.) 집현전(集賢殿)에서 새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펴내 올리었다. (《세종실록》 14/6/9)

 

사회 안정과 도덕심 앙양에 필요한 삼강오륜에 근거한 실례들을 소개한 책을 엮는데 글을 못 읽는 백성들을 위해 그림을 붙여 설명하기도 했다. 추정하건대 세종이 백성을 위해 뜻을 전하고자 할 때 전할 수단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글자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 이 《삼강행실》 펴냄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 본다.

 

(임금이 율문을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반포할 것을 이르다.) 임금이 좌우 가까운 신하에게 이르기를, "비록 사리(事理)를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율문(律文)에 따라 판단이 내린 뒤에야 죄(罪)의 경중(輕重)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죄를 지은 바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이 다 율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吏文]으로 번역하여서 민간에게 반포하여 보여, 어리석은 남자와 어리석은 여자들이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아뢰기를,

 

"신은 폐단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간악한 백성이 진실로 율문을 알게 되오면, 죄의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이 법을 제 마음대로 농간하는 무리가 이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백성이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옳겠느냐. 백성에게 법을 알지 못하게 하고, 그 범법한 자를 벌주게 되면, 조사모삼(朝四暮三)의 술책에 가깝지 않겠는가. 더욱이 조종(祖宗)께서 율문을 읽게 하는 법을 세우신 것은 사람마다 모두 알게 하고자 함이니, 경 등은 고전을 상고하고 의논하여 아뢰라." 하고,... 허조가 물러가니, 임금이 말하기를,

 

"허조의 생각에는, 백성들이 율문을 알게 되면 쟁송(爭訟)이 그치지 않을 것이요, 윗사람을 능멸하는 폐단이 점점 있게 될 것이라 하나, 그러나 모름지기 백성이 법을 알게 하여 두려워서 피하게 함이 옳겠다." 하고, 드디어 집현전에 명하여 옛적에 백성이 법률을 익히게 하던 일을 상고하여 아뢰게 하였다. (《세종실록》14/11/7)

 

허조는 백성이 법을 알면 법을 농간할 것이라 말한다. 세종은 고지식한 신하를 면전에서 반대하지 않고 품으며 백성을 향한 마음을 설득해 나간다. 세종의 대화에 따른 설득법의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훈민정음(언문) 창제, 이후 사건

 

세종이 25년 12월 30일 언문 28자 곧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후 세종 25년(1443)에 대궐 안에 언문청을 창설하였다. (《세종실록》의 기사와 《용재총화(慵齋叢話)》 권7의 기사에는 ‘언문청(諺文廳)’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후 11대 중종 1년(1506)에 폐지함. 한편 정음청이라고도 불린 바도 있다.) 훈민정음 창제는 처음 최만리의 반대 (《세종실록》26/2/20, 아래 ‘세종’으로)가 있었고, ‘언문 제작에 불가함이 없다고 말하고 다시 이를 반대’한 직전 김문에 장 1백 대를 때리게 하고(세종 26/2/21), 그 사이 집현전 교리 최항ㆍ부교리 박팽년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했다.(세종 26/2/16) 그리고 대간의 죄를 언문으로 썼는데 임금이 대간의 죄를 일일이 들어 언문(諺文)으로써 써서, 환관 김득상(金得祥)에게 명하여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이게 하였다.(세종 28/10/10)

 

그리고 이계전 등이 대간을 처벌한 것을 거두어 달라고 아뢰는데 의금부에 내린 언문(諺文)의 글을 보이면서, "범죄가 이와 같은데 죄주지 않겠는가." 하였다.(세종 28/10/10) 의금부 등에 언문 유시가 있었던 것이다. 공문서의 기능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수양 대군에게 명하여 대간의 죄를 일일이 들어 책망한 언문서(諺文書) 몇 장(張)을 가져와서 보이고 (세종 28/10/13) 이에 정창손ㆍ조욱ㆍ유맹부를 석방하였으나 강진은 석방하지 않았다.

 

이후 상주사 김구를 불러들여 《사서》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했다. (세종 30/3/28) 이후 민간에게까지 퍼져 정치를 비판하는 언문벽서가 나타났다. 당시 하연(河演)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행사에 착오가 많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언문으로 벽 위에다 쓰기를, ‘하정승(河政丞)아, 또 공사(公事)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세종 31/10/5) 이는 얼마나 문자가 갖는 영향력이 강하고 무서운가를 보여준 한 예이고 충격이었다. 이 때문에 사대부들이 훈민정음에 관해 호의를 갖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은 당연하고 이후의 문자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정음청(언문청)

 

《세종실록》의 기록과 《용재총화(慵齋叢話)》 권7의 기사에는 ‘언문청(諺文廳)’이라는 이름이 보이고 《문종실록》ㆍ《단종실록》의 기록에는 ‘정음청’이라는 이름이 있어서 두 가지 이름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정음청에서 수행하였던 사업이 무엇이었는지 실록의 기록에는 분명히 나와 있지 않으나, 《보한재집(保閒齋集)》에 수록된 신숙주(申叔舟)의 행장에 “임금님께서 언문 28자를 만드시고 궐내에 정음청을 설치하여 문신을 뽑아 언문관계 서적을 펴낼 때 신숙주가 실제로 임금님의 재가를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서문과 최항(崔恒)의 묘지에도 비슷한 기사가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훈민정음 창제를 앞뒤로 하여 이 사업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궁중에 언문청이 설치되었던 것 같다. 또한 《세종실록》 28년 11월의 기록에는 《용비어천가》를 보수하는 일을 언문청에서 맡았다고 하였으므로, 한글관계 전문기관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문종 이후 언문청이 있었지만, 설치 목적이 불경간행 등 소극적 사업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