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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글말 끌어와 망쳐 놓은 삶

김수업의 우리말은 서럽다 2

[우리문화신문=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  우리 겨레의 삶을 구렁으로 몰아넣은 옹이는 바로 중국 글말인 한문이었다. 기원 어름 고구려의 상류층에서 한문을 끌어들였고, 그것은 저절로 백제와 신라의 상류층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말과 맞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우리말에 맞추어 보려고 애를 쓰기도 하였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중국 글자(한자)를 우리말에 맞추는 일에 힘을 쏟으면서, 또 한쪽으로는 한문을 그냥 받아들여 쓰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한자로 우리말을 적으려는 일은 적어도 5세기에 비롯하여 7세기 후반에는 웬만큼 이루어졌으니, 삼백 년 세월에 걸쳐 씨름한 셈이었다. 한문을 바로 끌어다 쓰는 일은 이보다 훨씬 빠르게 이루어져, 고구려에서는 초창기에 이미 일백 권에 이르는 역사책 《유기》를 펴냈고, 백제에서는 4세기 후반에 고흥이 《서기》를 펴냈으며, 신라에서는 6세기 중엽에 거칠부가 《국사》를 펴냈다.

 

상류층이 이처럼 한문에 마음을 쏟으면서, 우리 겨레 동아리에는 갈수록 틈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배워서 익힐 시간을 가진 상류층 사람들은 한문으로 마음을 주고받는 새로운 길로 내달았으며, 배워서 익힐 시간을 갖지 못한 백성들은 언제나 우리 입말로만 마음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7세기 후반에는 한자로 우리말을 웬만큼 적을 수 있었음에도,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 상류층은 이것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한문을 부지런히 배워서 중국 사람을 따라잡아야 넓은 세상에서 사람답게 산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세월이 흐를수록 한문을 배워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벼슬길로 나가는 상류층 사람들은 우리 것을 모두 시들하게 보았다. 우리 것을 하찮게 여기고 중국 것을 우러르면서 한문에 힘을 쏟으면 쏟을수록, 벼슬길은 넓게 열리고 살기도 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길로 따라갈 수 없는 여느 백성들은 또 그만큼 제 삶이 고달프고 제 신세가 서러워 스스로 저를 부끄러워하며 업신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문을 아는 적은 사람들과 한문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물 위에 기름이 뜬 것처럼 갈라져, 하나로 어우러질 수 없는 길을 걸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만주 땅 드넓은 벌판을 야금야금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까닭의 깊은 속내가 바로 이렇게 겨레가 속에서 둘로 갈라져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세월의 흐름에서 우리말의 신세는 불쌍한 백성과 함께 서러움과 업신여김에 시달리며 짓밟히고 죽어 나갔다. 헤아릴 수 없이 죽어 나간 우리말을 어찌 여기서 모두 헤아릴 것인가! 셈말만을 보기로 들어 보면, ‘온’은 ‘백(百)’에게, ‘즈믄’은 ‘천(千)’에게, ‘골’은 ‘만(萬)’에게, ‘잘’은 ‘억(億)’에게 짓밟혀 죽어 나갔다. ‘온’에 미치지 못하는 ‘아흔아홉’까지는 아직 살아서 숨이 붙어 있다지만, ‘스물, 서른, 마흔, 쉰, 예순, 일흔, 여든, 아흔’으로 올라갈수록 한자말인 ‘이십, 삼십, 사십, 오십, 육십, 칠십, 팔십, 구십’에 짓밟혀 목숨이 간당간당하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말을 짓밟아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아 차지한 한자말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의 열에 일곱이 한자말이라는 소리까지 나올 지경이다. 세종 임금이 ‘한글’을 만들어 우리말을 붙들지 않고 줄곧 한문으로 글말살이를 했다면, 우리도 만주 벌판에 사는 사람들처럼 중국으로 싸잡혀 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