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소설을 지나고 대설도 한참 지나 동지로 넘어가는 어느 날 비가 내린다.
쌀가루 같은 흰 눈이 아니라 눈물같이 주룩주룩 내리는 비다.
아무 말이 안 나온다. 그냥 쓸쓸함 그 자체다. 포근함이 아니라 썰렁함이다.
마음이 차가워지며 문득 겪지도 않은 이별이 생각난다.
창문을 열어보니
한겨울에 웬 비
눈은 왜 비로 변했을까?
그대 없는 텅 빈 가슴에
찬기 서린 외로움, 사무친 그리움
한 줌 쓸쓸함마저 다가온다.
... 송태열, <겨울비> 중에서
20년 전 임현정이란 가수가 겨울비를 맞는 그런 마음을 노래로 잘 대변해 주었지.
사랑은 봄비처럼 내 마음 적시고
지울 수 없는 추억을 내게 남기고
이제 잊으라는 그 한마디로
나와 상관없는 다른 꿈을 꾸고
이별은 겨울비처럼 두 눈을 적시고
지울 수 없는 상처만 내게 남기고
이젠 떠난다는 그 한마디로
나와 상관없는 행복을 꿈꾸는 너
아직도 철없는 나뭇잎들이 갈 곳을 잊어버리고 애처롭게 매달려 떨고 있는 이 겨울에 죄 없는 미물들의 딱한 신세가 다 지구를 마구 사용한 우리들의 잘못 때문이 아닌가?
가을에도 덥다가 갑자기 추워져 미처 떨어질 준비도 못 하고 겨울을 맞은 이들,
우리가 자책해도 이들에게는 소용이 없구나.
인간에게 항거도 못 하고 계절의 역습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들에게 위로의 음악이라도 들려주고 싶다.
예전엔 못생겼다고 핀잔받던 모과들이 비 내리는 겨울에 위엄을 지키고 있구나
그 많던 꽃들, 그 아름다운 색들은 다 어디 갔는가?
한여름 생명수였던 빗방울들이 마지막 노란 기운까지 빼앗아 내려가는데
이 계절을 살아남을 우리들의 자존심은 무엇인가?
그래 우리는 차가워지지 말자. 슬퍼하지 말자.
품위를 지키며 버티자.
이 겨울비의 최면술에 넘어가지 말자.
어쩌면
잘 되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비로 내리는 게..
하얀 눈으로 덮은 채
겨울나기엔
숲엔 아직도
치워져야 할 쓰레기들이
사방 곳곳에 남아 있어서
여전히
불쾌한 악취를
풍겨내고 있어서라
그러니 이참에
굵은 겨울비 줄기 힘입어
몹쓸 쓰레기들
다 쓸려가게 해서
내년 봄엔 좀더
정상적인 초목들이
싱싱한 잎새
제대로 피워 올렸으면 좋겠다
... 오보영, 겨울비 소망 중에서
그렇게 우리는 이 빗물을 생명의 정화수로 받아들여 지난 한 해의 티끌을 씻어버리자.
그리고 새해에는 꽃부터 피우고 그다음 잎을 내고 열매를 맺는 산수유처럼
새 삶을 기약하는 것이다. 겨울비로 그런 마음 정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겨울은 곧 눈보라를 뿌리고 차가운 바람을 몰아치며 다시 존재를 알린다. 착각하지 말라는 것일 거다.
겨울의 잠시 일탈이 우리의 얼어붙을 마음을 잠시 녹여준 것은 사실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상은 겨울인 것이다. 다시 현실을 직시하자. 겨울을 각오하고 이 겨울을 견디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