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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때문에

인정을 바탕으로 덕이 형성된다
[산사에서 띄우는 편지 11]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정(情)이란 무엇일까? 가수 조용필의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정이란 무엇일까 받는 걸까 주는 걸까

받을 땐 꿈속 같고 줄 때는 안타까운 것

정을 쏟고 정에 울며 살아온 살아온

내 가슴에 오늘도 남모르게 무지개 뜨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공기처럼 보이지 않은 정의 기운을 주고받고 살아간다.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짐 속에서도 가슴과 가슴으로 보이지 않게 흐르는 것이 정일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정이란 우리 마음속에 따뜻한 감정의 원천이며 무형(無形)의 보시며 사랑이다. 정은 우리 혈관을 통해서 흐르는 피와 같다. 또 정을 생각하면 모정(母情)을 떠오르게 한다. 어머니 사랑이야말로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어머니 사랑을 잘 받고 자란 아이는 밝고 건강하게 자란다는 것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누구나 모성애 같은 정을 받기를 원한다.

 

정은 무엇보다 받는 쪽보다 베푸는 쪽에 값어치를 둔다. 이처럼 정에 근접한 용어를 찾는다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내가’ ‘무엇을’ ‘누구에게 베풀되 베풀었다는 생각마저 같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무주상보시야말로 희생봉사 그리고 진실한 자비, 사랑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또 정에 대해서 혹자들은 이렇게도 말들을 한다.

 

“정이란 너와 나를 풍부하게 하고, 정이란 세상을 풍부하게 한다.“

“인간은 정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정이란 대가 없이 무조건 주는 것이다.”

“정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보석이다.”

“정이 없으면 목석(木石)과도 같다.”

 

이렇게 정에 대한 값어치가 신성하고 고귀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인간이란 모름지기 정이 많고 볼 일이다. 하지만, 정이란 두 얼굴을 하고 있다. 인간에게 전형적인 미덕이면서 동시에 갈등과 아픔을 주기 때문이다.

 

가수 송대관의 「정 때문에」의 가사를 음미해 보자.

 

「정 주고 떠난 사람 그리워서 울긴 왜 울어

서럽게 버림받은 바보라지만 원망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까짓 것 사랑이야 잊으면 그만인 것을

가슴에 못이 되어 못이 되어 서러워 내 가슴을 치네요」

 

아무리 정 때문에 미움과 슬픔이 오고 간다 해도 인간과 인간 사이를 연결해 주는 고리는 정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정을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정의 속성을 살펴보면, 인간 서로의 관계에 따라 농도가 다르다. 친한 관계일수록 정의 수치가 높다 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이 찐할수록 친함도 찐해지고, 정의 농도가 났으면 그렇고 그런 사이일 뿐이다. 또한 정이라는 것도 변절이 심하여, 어느 날 갑자기 아무리 친한 관계라 할지라도 정이 떨어지면 헤어지고 만다. 정이 넘치는 잉꼬부부라 할지라도 정이 식으면 앙숙이 되고 자칫 감정 조절을 잘못하면 갈라서고 만다. 이것이 변덕스러운 정의 속성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반짝 연민의 마음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은 정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정의 속성은 순수하지 못하면 욕심으로 연결된다. 요즘 사람들은 조건부 정이다. 정을 쉽게 주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정을 주되 무언가를 요구한다. 또한 주지도 않으면서 받으려고만 하는 경향이 많다. 이렇게 계산적인 정을 진정한 정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이 시대를 두고 정이 메마르고 인색한 세상이라고들 한다.

 

200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르 클레지오’는 한국의 언어 가운데 ’정(情)‘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정이란 개념이 오묘하고 독특해서 영어, 불어사전을 뒤져봐도 해석할 길이 없다.”라고 하면서 “정이란 한국 사회의 특징적 선한 마음의 표현이며, 고유문화이기도 하고, 이심전심이라는 교감적 작용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생활해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했다.

 

 

그에게 감동을 준 한국의 정이란, 아마도 밥을 주걱으로 떠줄 때, 한 주걱은 정이 없으니 두 번 떠준다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았을 것이고, 부부 싸움도 칼로 물 베기라고 해서 싸우다 보면 정이 든다는 말에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나는 어릴 적에 전형적 농촌 시골 마을에서 자랐다. 초가지붕 아래 이웃집과 우리 집은 낮은 울타리가 처져 있지만, 이웃집과는 소통이 원활하여 부엌에서 파전을 구우면 그 고소한 냄새가 울타리를 넘어간다. 어머니는 파전이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잊지 않고, 접시에 곱게 담아 이웃집 사람을 불러 울타리 너머로 넘겨주곤 한다. 거기다가 좋은 일 궂은일 할 것 없이 서로 기쁨과 슬픔을 같이한다. 이것이 옛날 시골의 정서였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웃 간의 정이 깊숙이 스며있다고 보겠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현상들은 보기가 힘들다. 크나큰 아파트에 수십 세대가 살고 있지만 모두 각각 사는 모습이 다르다. 문제는 정이란 찾기 어렵고 옆벽 너머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간섭하거나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 조금이라도 나에게 불이익이 있으면 참지를 못하고 싸움으로 번진다.

 

이러한 생활공간에서 이웃 간의 정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제 옛정이란 표현은 기억 속에 사라져가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무슨 말로 정을 말할 수 있겠는가? 요즘 애들은 무조건 자기가 받는 것만 진정한 정으로 알고 커가고 있다. 남에게 진심으로 베풀고 주는 정을 모르고 자란다.

 

이렇게 갈수록 정이 무디어져 가고 생소해지다 보니 이제는 정이란 말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란 동화책 속에나 나올 이야기로 전락해 버릴까 두렵다. 르 클레지오가 한국을 보고 느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정’이 이제 우리나라 한국 국어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씁쓸하기만 하다.

 

중국 원나라 문인 원호문은 “만약 정이 없다면 짝 잃은 기러기의 서글픈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고, 명나라 탕현조는 「모란정」이란 대표 희곡 서문에서 “정은 어디서 생기는 줄 모르지만 한 번 주면 깊어지니 정이 있으면 산 자도 죽을 수 있고 죽은 자도 살아날 수 있다. 살아서 죽어보지 못하고 죽어서 살아나지 못한다면 지극한 정이라 말할 수 없다.”라고 했다.

 

또 옛말에 “너와 내가 하나로 더불어 살되 너를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정(情)이다. 정(情)이 떨어지면 마음이 떠난 것이니 마음이 없으면 속 빈 껍데기다.”라고 하였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정이 없다면, 정을 모르고 살아간다면 속빈 껍데기가 맞을 것이다. 속빈 껍데기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허망한 것이지 않을까? 정은 모름지기 주고받는 것이라고 본다. 줌으로써 받게 되는 것 당연한 사실이다. 설사 받지 못한다고 해도 정이 쌓인 참 성품은 고스란히 자기 것이 된다.

 

논어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鄰)‘란 말이 나온다. ‘덕불고필유린’이란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며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으로, 남에게 덕을 베풀며 사는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세상에서 인정받게 됨을 이르는 말이다. 사람이 덕을 쌓는다는 것도 상대를 대할 때 인정이 없으면 안 된다. 인정을 바탕으로 덕이 형성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정이 메말라간다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어 상대에게 정의 끈을 놓지 않기를 간절히 두 손 모은다.

 

앞뜰 솔밭 사이로 검은턱벌새 두 마리가 쉴 새 없이 오락가락 숨바꼭질하고 있다. 이 애들이 정을 알까? 그 애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도 어쩌면 그 애들은 일편단심 변하지 않는 끈끈한 정으로 뭉쳐 살아가는 듯하여 우리는 그 애들을 본받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2024 갑진년 새해에는 모두 이웃과 정을 듬뿍 나누는 한 해가 되기를 발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