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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학자 양종승의 <명인⦁명무 열전>

생명을 담은 이애주의 시대적 창작춤

이애주 전통춤의 계승 그리고 미학 세계 2
민속학자 양종승의 <명인⦁명무 열전> 4

[우리문화신문=양종승 민속학자]

 

(1) 「땅끝」

 

한국춤 현실에 대한 이애주의 비판의식을 잘 드러낸 시대적 창작춤 「땅끝」, 「나눔굿」, 「도라지꽃」은 당시 춤계가 안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풀어내기 위한 갈망의 몸부림이었다. 첫 번째 작품은 지금으로부터 1974년, 6월 22일부터 23일까지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펼쳐진 제1회 이애주 전통 춤판과 창작춤 「땅끝」이었다. 낮 3시 30분과 밤 7시 30분 등 모두 이틀 동안의 4회 공연은 국립국악원 악사 반주 음악과 함께 이애주 스승 한영숙을 비롯한 동료 정재만, 채희완 및 대학 탈꾼 그리고 무용 전공 학생들이 함께한 성대한 춤판이었다.

 

1부 전통춤은 <이애주의 춘앵전, 이애주ㆍ정재만의 학무, 한영숙의 살풀이, 채희완 외 7인의 봉산탈춤의 뭇동중, 이애주의 미얄춤, 김민기, 장민철, 이애주, 유갑수, 김석만 등의 불교의식춤 그리고 이애주의 「승무」> 공연이었고, 2부 창작춤은 「땅끝」으로 막을 올렸다.

 

20대 중반을 갓 넘긴 이애주가 춤판에서 던진 메시지는 강렬했다. 그 내용을 1974년 이애주 춤판 팜플렛에서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오늘, 이 땅에서 춤을 춘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춤을 추지 않을 수 없는 데에 춤꾼의 절규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춤 현실은 어떠한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우리 춤이 무의식적 태만과 무사상적 몸짓으로 저급하게 전락했고, 소수인의 독점적 전유물로 고립되어 문화 형태에서 가장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 버렸으니, 오욕과 슬픔으로 가득 찬 문화 현실 속에서 아무 탈 없이 있다는 것이 소름 끼치도록 부끄럽기만 하다. 뜻을 같이한 동료 학우들과 함께하는 춤판은 참을 수 없는 아픔의 몸짓이다. 퇴폐와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지는 현존의 춤을 정리키 위해 전통춤을 바탕으로 우리 춤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이번 춤판은 전통문화의 전승 발전이라는 과업 아래 우리 춤의 원형을 최대한 살리어 우리의 몸짓에 바탕을 두고 오늘의 문제의식을 표출코자 한 것이다. 이에, 오늘의 춤은 절규의 몸부림이 될 것이다.”

 

 

이애주 비판의식은 아픔, 통감, 절규였다. 그것은 우리 춤의 본질을 파악하고 전통의 정통성 토대 위에 민족문화의식을 살리기 위한 춤꾼의 몸부림이었다. 민족예술이 처한 시대적 현실에 대한 뜨거운 비판으로부터 출발한 이애주의 춤에 대한 시대적 인식 그리고 그가 안고 있었던 춤 사상은 마치 1930년대 전통춤 현실을 개탄하며 죽어가는 조선 춤 되살리기에 매달리며 울부짖던 한성준의 문제의식을 되살리는 것 같았다. 당시 변화의 물결 속에서 조선의 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예술 정신을 이어나기 위해 분투하였던 한성준의 문화예술 계승 정신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욕과 비애에 젖은 춤계 현실을 극복하고, 우리 춤의 진리와 도리를 향한 민족춤 회복 추구의 시대적 춤으로 거듭나기 위함이었다. 무의미한 몸짓과 국적 불명의 겉치레 형식에 사로잡혀 고착화로 치달았던 독점적이며 폭압적 실상을 파헤치고, 얼룩진 잘못을 태만함으로 바라보는 춤계의 나태함을 고발한 문화적 저항이요, 예술적 반항의 한 판이었다. 당시, 사회 문화 의식에 대한 저항, 분노 그리고 쟁투로 인해 민족춤이 갖는 미의식으로의 전환을 도모하는 생명성이 꿈틀거리는 참 춤 활동의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춤판 구성에서도 첫날 마련된 고사굿 그리고 매번의 공연에서 생동감 있게 살아난 제의성과 역동성은 춤꾼과 관객이 소통하여 춤판의 참 의미를 공유하고 현실에 대한 아픔과 고통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나아갈 희망찬 우리춤 미래를 담론화하였다. 그야말로 살아 숨 쉬는 춤을 창출해 내기에 넉넉한 판이었다. 그러한 춤판 이면에는 춤에 대한 생명철학이 담겨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가 춤을 추게 하는 것이며, 그의 근본은 삶의 활동상이고, 이는 결국 생명력을 기반 삼아 자기분출로 이루어지는 생성론적 원리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이애주 춤판에서는 춤과 미학에 대한 학구열도 부추기는 현실주의적 춤극의 시도기도 하였다. 이로써 이애주의 춤 그리고 그가 주창한 춤론은 세간을 시끄럽게 하고도 남았다. 썩은 춤을 끊어버리고 외부로부터 들어온 신무용과의 결별을 선포하였으며, 우리네 춤 사상을 담아낸 생산적인 우리 춤 실현을 공표하였기에 그렇다. 그러나 신무용으로 점철된 기성 춤계는 침묵하였다. 비평의 목소리 또한 고요했다.

 

(2) 「나눔굿」

 

춤판이 펼쳐진 지 10년이 지난 1984년 4월 29일부터 30일까지 이애주는 <춤패 신>을 창단하고 국립극장 실험 무대에서 첫 번째 창작 춤판을 펼쳤다. 그것은 겨레 곳곳에 담겨 있는 신인일체적(神人一切的)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는 터 벌림의 춤판 「나눔굿」이었다. 지향하는 바는 다름이 아닌 춤계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고, 모두가 함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밥을 주제로 한 나눔굿을 펼쳐 밥과 떡 그리고 술을 나누어 먹는 공유 정신의 되살림이었다.

 

 

불교의식 춤, 식당 작법이 이애주 춤판에 등장하면서 또 한 번의 사회 예술적 주제로 승화시켰다. 터를 정화하자 춤판에는 은덕을 베푸는 거대한 괘불이 모셔졌다. 연등을 띄우고 향을 피어 짓소리(부처에게 재를 올릴 때, 불법ㆍ게송을 길게 읊는 소리) 홋소리(범패에서 사용하는 음악의 하나)의 어산으로 바라춤과 나비춤, 팔정도 수행을 다짐하는 타주가 이어지면서 춤판을 고조시켰다.

 

솥뚜껑, 밥뚜껑, 주걱, 국자, 냄비, 깡통 등의 식기를 두드려 소리를 내자 밥그릇을 향한 아귀다툼의 아수라판이 펼쳐지고 번개 속 불꽃인 듯 밥그릇이 강림하였다. 드디어 고해 속 깨달음이 밥그릇 나눔으로 드러나자, 만유의 밥을 나눠 먹으며 밥 춤판이 전개되었다. 누구나 평등하며 함께할 수 있다는 공동체 정신을 되살리고 참 정신을 회복하는 춤판이었다. 그리하여 그 속에서 피어오른 평화, 생명, 상생의 제의 그리고 잔치로 의미를 살리는 것이었다.

 

(3) 「도라지꽃」

 

다음 해인 1985년 6월 23일부터 24일까지 서울놀이마당에서 <춤패 신>의 두 번째 창작품 「도라지꽃」으로 또다시 세상을 흔들었다. 일제에 의해 태평양 전쟁에 강제 동원된 조선 누이들의 가혹하고 잔혹한 인권 짓밟힘을 고발하는 춤판이요, 그들의 원혼을 달래고 생명을 되살리는 치유의 춤판이 펼쳐졌다. 여성 해방과 참인간 해방이라는 주제를 중심에 놓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춤판을 펼쳤다. 그림, 노래, 문학을 끌어들여 장르 연합이라는 또 다른 세계로의 춤 형식과 구성 그리고 의미와 역할을 탐색하는 춤의 축전이기도 하였다.

 

 

판을 여는 초입에는 경건한 의식으로 일본군 강제위안부 징용에 끌려간 원혼을 도깨비로 형상화하여 그려냈다. 첫째 마당의 너울춤과 일 춤으로 민중들의 평화로운 일상을 그려내고, 둘째 마당의 역사적 질곡으로 빠져든 징용춤, 징병춤, 일본군 강제위안부 춤으로 몸부림을 쳤다. 셋째 마당의 억압과 굴레에서는 피나는 고통과 힘든 역경을 깨치고 생기가 돋는 되살아 숨 쉬는 부활 춤을 그려냈다. 해방의 땅, 민족의 터, 민중의 생명력을 살려내는 춤이었다. 춤이 우리네 가슴속에 맺힌 한과 신명을 들어내는 행동 양식임을 보여주는 이른바 억눌림에서 일탈하는 해방춤으로 마무리하였다.

 

(4) 정리

 

누구나 알다시피, 개화 이후 한국 춤계는 서구 문화와 함께 서양의 민속춤(folk dance) 그리고 사교춤, 모던댄스 등의 서양춤이 수입되었다. 1926년 일본의 이시이 바쿠 신무용도 도입되면서 ‘춤’은 ‘무용’으로 바뀌게 되고 선진적 예술과 후진적 놀이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식민주의적 세계관 사상으로 뒤덮인 서양춤 현실을 안고서 외래춤 수용과 전래춤 거부라는 이원론적 사고에 싸여 있었다. 급기야 기존의 것이 들어온 것과 충돌하여 갈등을 일으키면서 기존의 것은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 유럽 풍조의 신무용이 전통춤을 배척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새로운 무용을 받아들이기 위해 기존의 틀을 부셔야 한다는 춤계의 패러다임 전환 요구에 따라, 전해져 내려온 춤은 혼돈의 시기를 맞게 된 것이다. 한국춤계가 받아들인 신무용은 다름이 아닌 유럽 무용의 진보적 사상과 형식의 수용이었다. 이는 기존 고전적 발레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독일 무용계로부터 시작된 이른바 중앙유럽무용(central European dance)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한국 춤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래 춤계는 유럽풍 형식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대적 처지에 몰렸다.

 

그것은 사방의 트인 춤에서 서양식 형태의 정면을 향한 무대 춤으로, 신앙성을 배경으로 한 춤에서 과학성을 추구하는 춤으로, 삶이 녹아 있는 서민의 춤에서 예술철학을 담은 고급화된 상류계층의 춤으로, 더불어 공감하는 춤에서 관객 주입식 춤으로, 즉흥성을 갖는 춤에서 정형화한 춤으로의 탈바꿈 등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무용계뿐만 아니라 여러 각 분야에서도 외래 문물의 소용돌이 속에 갇혔다.

 

 

드디어 문화예술계 안팎에서 한국학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때를 같이하여 전통문화복원을 위한 주체성 찾기 명분으로 민족춤 회복 운동이 전개되었다. 춤계에서는 선구적으로 예술지상주의적 신무용의 탐미성을 제압하는 몸짓으로 이애주 춤판, 땅끝이 서막을 장식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1970년대 초부터 전개된 탈춤 부흥 운동과 새로운 대동놀이를 위한 신명풀이 등으로 이어져 우리 시대의 판놀이로 확대되었다.

 

1974년 이애주가 내세운 <춤판>은 용어 그 자체만으로도 기존의 틀(패러다임)을 파괴하는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우리춤의 민족성과 생명성 그리고 예술의 독창성을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왕의 외래적 표기 ‘무용’에서 우리 고유 몸짓 ‘춤’으로의 전환을 선포하며, 올바른 춤 터 닦기를 묵시적으로 선언하였기에 그가 던진 용어 하나하나가 춤계를 흔들었다.

 

춤추기에서의 판은 응어리진 고통과 쓰라림을 쓰다듬고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한 치유의 공간으로 개념화되었다. 그러하기에 이애주가 펼친 춤판에서는 생명성을 담보한 이애주 춤 철학의 진수를 드러냈다. 희망찬 밝은 환희가 내리쬔 꽃밭의 움직임이 피어난 판의 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훗날 이애주 바람맞이 마지막 판에서 피어오른 꽃춤으로 승화됐다. 그것은 민중의 자주 그리고 권리 회복의 희망으로 피어난 새 생명의 꽃이었다.

 

1984년 이애주의 「나눔굿」은 열려 있는 춤판, 살아 숨 쉬는 생명의 몸짓, 시대의식을 꿰뚫는 생산적 춤새, 관중과 더불어 놀고 나누는 참 춤 의미를 살리는 춤판이었다. 이로써, 아수라 밥 판을 척결하고 생성력 본질을 회복하는 의례와 예술의 복합적 춤판으로 되살아나게 한 것이다. 그리고 1985년 「도라지꽃」은 생명 되살림을 울부짖는 멍든 민중 가슴을 쓰다듬기 위한 영혼 살림의 또 다른 이애주 춤의 생명철학을 담았다.

 

이렇듯 이애주 춤에서 되살아 난 생명 춤 낱낱에는 전통의 정통으로 녹아든 춤새를 촘촘히 살려내 응집하고 응용하여 실천적 몸놀림이 되게 하였다. 심미적 춤 예술의 극치를 사회적이고 시대적 상황에 맞춰 극적으로 해석하고 풀어낸 삶의 철학이 이애주 해방춤으로 그려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