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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184년 전 오늘, 제주로 유배 간 추사 김정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9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청(鞫廳, 조선 때, 역적 등의 중죄인을 신문하기 위하여 임시로 설치했던 관아)에서 가두어둔 죄인 김정희(金正喜)를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하라.“ 《헌종실록》 7권, 헌종 6년(1840년) 9월 4일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로써 조선 후기 선비이자 금석학자, 문인화가, 서예가로 그 이름을 중국에까지 알렸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 대정현에 유배를 가게 됩니다.

 

 

여기서 ‘위리안치(圍籬安置)’란 죄인이 귀양살이하던 곳에서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죄인을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을 말합니다. 그는 탐관오리를 탄핵하다가, 임금과 신하 사이를 이간시킨다는 사유로 임금의 미움을 사서 추자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능지처참 된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무려 9년 동안 유배되었습니다. 그 뒤 1851년(철종 2년)에 풀려났다가 다시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모두 12년을 유배되어 살았습니다.

 

14.7m에 이르는 대작 국보 <세한도(歲寒圖)>를 그린 서예가며 대학자인 추사는 제주도 유배 때 다리를 제대로 뻗을 수조차 없이 좁은 것은 물론 거미와 지네가 기어다니는 방 안에서 살아야 했지요. 또 콧속에 난 혹 때문에 숨 쉬는 것도 고통스러웠으며, 혀에 난 종기 때문에 침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화가 날 때에도, 외로울 때도, 슬프고 지치고 서러움이 복받칠 때도 붓을 들어 고통을 잊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뛰어난 걸작품이라는 ‘세한도’도 이때 그렸고, 흔히 추사체라 불리는 그의 독창적인 서체도 이때 완성되었다고 하지요. 어쩌면 유배가 없었다면 추사는 그렇게 위대한 인물은 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