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쓸모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확실한 쓸모가 없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 꾸미개 곧 장신구도 그렇다. 꾸미개가 없다고 해서 크게 불편하진 않지만, 꾸미개가 있으면 일상이 훨씬 풍요로울 수 있다.
박세경이 쓴 이 책, 《곱구나! 우리 장신구》는 일상을 아름답게 가꿔주었던 전통 꾸미개를 다룬다. 지금도 특별한 날에는 꾸미개를 즐겨 착용하지만, 예전에도 일상을 빛내주는 용도로는 꾸미개만 한 것이 없었다. 혼인이나 과거급제처럼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꾸미개는 특히 빛을 발했다.
꾸미개에 얽힌 옛사람들의 생활 모습도 정겹다. 돌잔치, 혼인, 장원급제, 장례와 같이 굵직굵직한 삶의 큰 사건에는 늘 꾸미개가 있었다. 일생에 몇 번 찾아오지 않는 중요한 순간들을 가장 예를 갖추어 진중하게 맞이했던 진심이 느껴진다.
그 가운데 장원급제 때의 차림과 꾸미개가 특히 눈길을 끈다.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처럼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연두색 앵삼을 입고, ‘복두’라는 관모를 쓰고, 복두에 어사화를 꽂았다. 어사화는 보라색, 노란색, 다홍색 등 다양한 색깔로 만든 꽃으로 임금이 내린 꾸미개였다.
장원 급제자는 합격 증서인 홍패를 받고, ‘어사주’라는 술도 마셨다. 사흘에서 닷새 동안 음악을 연주하는 악대와 공연하는 광대를 거느리고 거리를 행진했고, 친척들과 자신을 가르쳐 준 스승에게 감사 인사를 올렸다.
관모에 꽂은 어사화야말로 두고두고 자랑스러워할 꾸미개가 아니었을까? 장원급제가 입신양명의 출발점이자 으뜸 효도였으니, 어쩌면 생애 전체에서 가장 귀하게 여겼던 꽃일 수도 있겠다. 앵삼을 입고 어사화를 꽂는 것은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이 꿈에 그리던 ‘인생 명장면’이었을 것이다.
한편 장례 때의 옷과 꾸미개는 매우 생소할 법하다. 요즘은 모두 수의를 입지만, 옛날에 부유한 집안에서는 죽은 이가 평소 입던 좋은 옷을 그대로 입혔다. 관리였던 사람은 관복을 입히고, 머리에는 평소대로 망건이나 복건을 씌웠다. 여자는 시집올 때 입었던 원삼을 입혔다. 그만큼 원삼은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옷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겨 거친 삼베옷을 누더기처럼 해서 입었다. 남자는 짚과 삼을 섞어 굵은 동아줄처럼 만든 ‘요질’을 허리에 두르고, 머리에는 ‘굴건’이라는 관모를 쓰고, 삼 껍질을 왼쪽으로 꼬아 만든 둥근 테인 ‘수질’을 다시 둘렀다. 다리에는 ‘행전(바지ㆍ홑바지를 입을 때 정강이에 감아 무릎 아래에 매는 물건)’을 찼다.
여자는 얼굴에 넓고 긴 삼베 조각을 덮고, 남자와 비슷하게 수질(首絰 상복을 입을 때 머리에 두르는, 짚에 삼 껍질을 감은 둥근 테)을 두르고 미투리(삼이나 노 따위로 짚신처럼 삼은 신)를 신었다. 슬픔에 몸을 가누기 힘들 것 같으면 지팡이를 썼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대나무 지팡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동나무 지팡이를 짚었다.
용모를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마음은 남자나 여자나 같았다. 조선시대 남자들도 장신구를 많이 했다. 부모님이 물려준 신체를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유교 정신에 따라 귀고리는 차츰 사라졌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멋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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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는 망건(상투를 틀 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리에 두르는 그물)을 졸라매는 끈인 당줄을 걸어 넘기는 것으로 망건 위의 양옆 관자놀이에 다는 것인데, 무엇으로 만든 관자를 쓰느냐에 따라 신분을 나타내기도 했어. 신분이 높은 사람은 금, 옥 등을 사용하고 백성들은 짐승의 뼈나 뿔, 바다거북 등딱지, 마노, 호박 등을 썼지. 아름다워지고 싶은 마음은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았나 봐.
이렇듯 남녀노소 일상을 꾸미는 역할을 했던 우리 꾸미개는 오늘날에도 그 전통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비록 서양식 꾸미개가 대부분 그 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전통 꾸미개도 조용하게, 그러나 꾸준하게 사랑받으며 명맥을 잇고 있다.
전통이 어렵게 느껴진다면, 가벼운 꾸미개를 착용하며 멋을 내보면 어떨까. 일상 속 매력을 더해주었던 전통 꾸미개는 멋스럽고 고운 데다, 오늘날의 장신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정서까지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