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눈을 들어 앞을 보니 8개의 기둥이 수평으로 길게 늘어져 있다. 기둥 사이 7칸의 공간이 하나하나 병풍의 면처럼 보인다. 둥글넓적한 자연 그대로의 돌을 다듬지 않고 주춧돌로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덤벙주초>의 누각 건물, 2층에는 마루를 깔았다. 정면이 7칸이지만 측면은 2칸이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길쭉한 건물이라고 하겠다. 이 건물이 만대루(晩對樓)다.
이 만대루가 새해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모 방송국에서 드라마를 찍으면서 만대루에 소품으로 청사초롱을 걸어놓기 위해 기둥에 못을 박은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당연히 난리가 났다. 어떻게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에 못질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드라마 제작진의 부주의 혹은 실수에 대한 질책이 쏟아졌고 이 문화재를 관리 감독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임문제도 거론되었다.
그런데 만대루는 뭐 하는 곳이고 만대루는 무슨 뜻인가?
만대라, 늦을 ‘만(晩)’, 마주볼 ‘대(對)’, 늦게까지 마주 본다라는 뜻이란다. 무엇을 마주 볼까?
만대루 앞에는 강이 흐르고 강 건너가 병산(屛山이다. 병풍산이란 이름 그대로 만대루 앞에 산이 병풍처럼 수직으로 펼쳐져 있다. 나무계단을 밟고 2층 다락으로 오르면 너른 마루가 눈에 들어오고 그 앞에 절벽이 있는 환한 산이 강물 건너에 진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푸른 하늘에 시원한 병풍을 펼쳐놓은 듯하다. 과연 우리나라 전국의 그 수많은 정자나 누각에서 불 수 없는 독특하고 멋진, 최고의 자연병풍이다.
이렇게 텅 빈 곳에서의 자연 병풍을 보여주는 만대루는 조선 건축 최고의 멋쟁이 건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누각을 지탱하는 기둥과 지붕으로 구성된 단순한 부재, 장식적 공간을 극도로 절제한 건축미, 바닥 평면과 기둥 높이 그리고 지붕의 물매 등의 상큼한 비례.... 이런 것들이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건물 안의 인공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가 된 공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왜 이런 건물을 만들었을까? 조선시대 많은 건물이 이렇게 바람이 통하는 땅에 높여 지으면서 자연과 벗한다는 것은 어릴 때부터 많이 배웠다. 그런데 이곳 만대루에서는 뭘 마주하고 있고 뭘 생각하는가?
마주하고 있는 것은 병산이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여름에 잎이 무성하면 그 푸르름이 강물에 비쳐 더없이 깨끗한 세상을 보여준다. 이런 누마루는 유생들이 학문과 열정을 토로하며 우주 질서와 자연 순환을 탐구하던 성리학적 공간이다. 곧 학문의 수련장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덤벙주초에 자연 그대로의 기둥으로 구성된 아래층과는 대조적으로, 위층은 반듯하게 다듬은 누마루 기둥들이 정제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성리학적인 자연관과 조선 선비들의 꼿꼿하고 청청한 정신이 아래위층 건물에 동시에 담겨 이어오고 있다.
만대로에서의 만(晩)은 저녁무렵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늦다는 뜻도 있으니 늦게까지 봐도 질리지않다는 뜻이 들어간다. 만대라는 말은 중국 당 나라 때의 시인 두보의 백제성루(白帝城樓) 라는 시에 나오는 翠屛宜晩對 (취병의만대, 푸른 병풍 같은 절벽은 저녁놀에 대하기 좋고 )라는 데서 찾아서 써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저녁 늦게 혹은 늦게까지 바라보는 경치란 뜻의 이 '만대'라는 말은 도를 추구하는 선비들의 마음에 들었덤 모양이다. 수백 년 뒤 송나라의 주희(朱熹, 곧 朱子)는 무이산 무이정사(武夷精舍) 부근에 정자를 지어 만대정(晩對亭)이란 이름을 붙이고는 그것이 두보의 시에서 찾아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만대정이란 시를 지었는데
倚笻南山巓 지팡이에 의지해 남산 정상에 오르니
卻立有晩對 도리어 만대봉(晩對峰)이 서 있네
蒼峭矗寒空 푸르고 높게 차가운 하늘과 가지런한데
落日明影翠 저녁놀은 푸른 절벽을 선명하게 비추네
라고 하였다. 병산서원의 만대루 설명 그대로 아닌가? 처음 두보는 백제성에 올라 눈 앞에 펼쳐진 경치를 묘사했는데, 여기에서 쓴 만대라는 절묘한 표현을 주희가 주목을 하고는 그것을 자신이 지은 정자 이름에 붙이고 이곳에서 성리학의 도를 깨우쳐서 얻는 경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산서원의 만대루는 처음 단어는 두보의 시에서 따왔다는 사실만큼(만대루를 안내하는 글에서는 대부분 두보의 시구만 언급한다), 주희가 밝힌 대로 성리학에서의 깨우침을 얻는다는 의미가 그만큼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것이 우리나라에 만대라는 이름이 들어선 사연일 것이다.
경북 영주시 평은면에 가면 거기에도 임진왜란 직후 만들어진 만대정이란 정자가 있다. 영 정조 때 안동의 대학자로 작은 퇴계라고도 불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1711~1781)은 이 정자의 중수기에서
"대개 두보(杜甫)가 이 시를 지을 적에 단지 풍경을 읊는 자료로 삼았을 뿐, 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회암(주희) 부자가 두보의 시를 인용하여 무이정사 정자의 이름을 삼은 것이나, 퇴도(退陶: 퇴계) 선생이 이 시에서 취하여 취병산(翠屛山)의 아취를 읊은 뜻으로 말하자면, 인자(仁者)와 지자(智者)가 다니면서 산수를 즐긴 것에 뜻을 부친 것으로써 연비어약(鳶飛魚躍,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뜻)과 천광운영(天光雲影, 하늘빛과 구름그림자 함께 노닐다)의 이치와 더불어 상하 사방을 돌아보는 사이에 함께 어울린다는 것이다"
라고 이 만대라는 개념이 느긋하게 천지간의 올바른 도를 깨달아 맛보고 즐기는 방편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처럼 만대루는 단순히 "자연을 대하는데 늦게까지 봐도 좋더라"라는 평범한 경치구경을 넘어서서 바로 이곳에서 맑은 심성으로 자연의 이치를 파고 들어가면 천지를 넘은 경지를 얻을 수 있다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만대루는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전형으로 병산서원과 함께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이리라.
만대루는 문화재 보호를 위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그런데 이곳이 드라마 촬영용 소품을 걸기 위해 못이 박히는 아픔을 겪으니, 우리들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필자도 지난 11월 말에 병산서원의 만대루를 직접 눈으로라도 잘 보려고 지인들과 함께 찾았으니, 그때 마침 저녁 무렵이었지만, 드라마 촬영한다고 아무 소리도 못 내게 하고 만대루 근처에는 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위에서 출연진들이랑 스태프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는 조금 화가 난 적이 있다. 아마도 그 촬영팀이 아닐까 싶은데, 제작진들이 이런 문화재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그저 형식적인 허가를 받고는 못을 박는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KBS에서도 공식으로 사과하고 또 관계당국이 적절한 조사와 처리를 할 것으로 믿는다.
다만 차제에 선조들의 맑은 숨결을 전해주는 이런 대단한 문화재들이 함부로 촬영장으로 쓰이는 것은 앞으로 허가해 주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역사 드라마는 아무래도 옛날 집이나 성, 마을 등에서 촬영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문화재의 훼손으로 이어지면, 안될 것이다. 정 필요하면 복제품이나 세트장을 지어서 활용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우리가 숭례문을 화재로 잃고 다시 복원하느라 온갖 마음고생을 다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만대루란 건물의 역사와 의미도 자세하게 알아보니 중요한 것들이 많다. 이처럼 모든 문화재에는 대단한 역사가 있으니 우리는 그것을 잘 배워 알고 더욱 멋있게 가꿔 후세에 전해주어야 할 책임을 위탁받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