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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대만에서 만난 ‘장개석’

중국 근대사에서 모택동과 함께 쌍두의 영웅이었음을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85]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1949년10월1일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인 마오쩌둥(毛澤東)은 북경의 천안문광장 높은 문 위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정식으로 선포했다. 중국 대륙의 주인공이 완전히 바뀌었음을 세계에 알린 것이다.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패한 장제스( 蔣介石)는 그해 12월에 대만(臺灣)으로 옮겨와 중화민국의 성립을 알렸다. 그리고 대만의 중화민국이 유엔에서 나오고 그 자리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대신 들어감으로써 대만의 중화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독립국이 아니라 중국의 속국 신세로 주저앉았다.

 

중화민국 총통을 지낸 장세스(蔣介石)를 우리는 예전에 장개석으로 불렀다. 원래 이름은 장중정(蔣中正)이고 개석(介石)은 자(字)인데 흔히 장개석으로 통용되었다. 대만 발음도 장개석에 가깝다. 그 뒤 중국 보통화의 독법대로 이름이 장제스로 바뀌어 불린다.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은 예전대로 장개석으로 부르는 것이 편하다. 마찬가지로 타이완(臺灣)도 대만으로 표기한다.​

 

1989년 6월4일 중국 북경에서는 천안문 사건이 발생해 중국 정부에 대해 민주화를 요구하며 광장을 메우고 있던 대학생들이 중국 인민해방군의 강제진압에 의해 많은 사상자를 내며 진압되었는데 당시 한달 동안의 실크로드 취재를 마치고 북경에 있던 필자는 6월 5일 혼란스러운 북경에서부터 홍콩으로 나와 북경에서의 탈출 러시를 우리나라 텔레비전 뉴스에 보도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6월 6일 중국의 역사유물 촬영을 위해 대만(臺灣)의 타이베이(臺北 대북)로 가서 시내 한가운데에 있는 중정기념당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대만으로 내려와 통치하다가 1975년 별세한 장개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축물이다. 당시 그 앞에는 '무망재거( 毋忘在莒)'라는 장개석의 큰 글씨가 걸려 있었다. 이 글은 옛날 춘추시대에 제(齊)나라가 거(莒)라는 땅에 쫓겨가 있을 때 고초를 겪은 상황을 잊지 말고 제나라가 다시 부흥한 것처럼 다시 일어서자는 뜻을 담은 고사성어였다. 그 중정기념당을 최근 여행으로 방문할 수 있었다. 35년여 만이다.

 

 

 

기념당은 25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넓은 부지 북편에 70미터 높이로 솟아 있다. 어마어마하게 압도적이다. 기념당에 오르는 계단은 세 길로 되어 있어 옛날 황궁의 양식처럼 가운데의 것은 황제의 길이다. 사람들은 그 옆으로 오르고 내린다. 화강암으로 된 84개의 계단을 오르면 본당이 있고 여기에 다시 5개의 계단이 더 있어 합계 89개로 장개석의 나이를 상징한다. 기념당은 중화민국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샹징하는 청과 백 두 색으로 지붕과 벽을 칠했다. 기단은 네모로 장개석의 이름인 중정(中正)을 뜻하고 그 위에 팔각으로 푸른 기와를 얹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큰 홀 한가운데에 대만의 국기인 청천백일기가 있다. 4층에는 높이 6.3미터의 앉아있는 장개석 동상이 있다. 예전에는 군 의장대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1층에는 많은 전시공간이 마련돼 있어 각 방에는 장개석의 활동을 알리는 사진과 유물, 실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1887년 태어나 1975년까지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인이자,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제2, 4대 총통, 대만으로 옮겨간 이후 제1~5대 총통 등 파란만장한 긴 생애를 보여주는 많은 사진과 유품, 소품들이다. 늘 중산복이라고 하는 제복을 입고 있었기에 그런 유품이 남아있고 그가 타고 다니던 1972년 미국 캐딜락 차도 진열되어 있다.

 

 

이 사진과 유품을 통해 중국의 근대를 열심히 살아간 개석 장중정의 삶을 조금이라도 다시 보게 된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에 세워졌다가 다시 군벌 시대, 항일전 시대를 거치면서 중국 근대의 가장 큰 거목으로서 중국을 통일한 그가 2차대전 뒤 공산세력에 밀려 대륙을 다 잃고 대만으로 내려온 역사가 그 속에 있다. 장개석은 1932년 상해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본 뒤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해 주었고 독립군 양성과 광복군 창설도 지원해 주었다. 카이로 회담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고 얄타회담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그러한 그의 정책의 숨은 의도에 대해서는 의심과 비판이 있지만 한국에 애정을 보이고 많은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일본과 항전을 하던 1943년 3월 장개석은 《중국의 운명《中國之命運》》이란 책을 펴내 당시 국제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일본이 금서로 지정할 정도였던 이 책에서 장개석은 ​

 

“최근 백년 이래 국세는 부진하고 民氣(민기)는 消沈(소침)하여 오천 년 이래 일찍이 보지 못한 정세를 초래하였다. 중화민족의 생존에 필요한 영역은 분할되고 불평등조약의 속박과 압박은 국가, 민족의 생활기능을 끊었다. 5천 년의 역사에 국가, 민족의 흥망성쇠가 때로 나타났으나 최근 백년 동안처럼 정치, 경제, 사회, 윤리, 심리 각 방면에 긍하여 내우외환이 절박하고 재흥의 기초까지도 단절되려 한 위기는 없었다. 국부 손문이 삼민주의를 제창하여 국민혁명을 지도하지 않았더라면 오천 년 이내의 생명은 일본의 잠식에 의하여 제2의 조선(한국)으로 되었을 것이다.”

 

라는 진단과 함께 중국은 손문이 제창한 삼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나라를 부강하게 하여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고 새 나라를 건설해 세계 역사의 주체가 되자고 역설하였다. 그가 대륙 중국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대만으로 쫓겨간 점을 놓고 그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긴 하지만, 공과를 떠나서 중국 근대사에서 모택동과 함께 쌍두의 영웅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전시장에는 그의 집무실이 밀납인물상과 함께 재현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책상의 서랍이 자기 쪽이 아니라 부하들 쪽으로 놓였다는 점이다. 그는 부하들이 와서 필요하면 아무 서랍이나 열어 보고 준비하라고 늘 그렇게 책상을 놓았다고 한다.

 

 

1949년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내려와 외성인(外省人)으로서 장기 집권하며 철권통치를 했던 장개석, 1975년 그가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 장경국(蔣經國 장징궈 1935~1988)이 78년부터 88년까지 두 차례 총통을 하는 등 국민당 인사들이 정권을 맡았으나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야당인 민진당의 천수편(陳水扁 천수이벤)이 8년을 집권하면서 대만에 민주화 바람이 불어 이 기념당도 변화를 겪는다.

 

기념공원 입구에는 크고 아름다운 패방(牌坊)이 있었다 건립 당시에는 이름인 중정을 넣어 '大中至正(대중지정)'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민진당 정부는 2007년 과거 국민당과 장개석의 색깔을 지우자며 '自由廣場(자유광장)'이라고 바꾸었다.

 

 

중정기념관이란 이름도 국립대만민주기념관(國立臺灣民主紀念館)으로 바뀌어 대만 민주화 운동의 전시 비중을 대폭 확대했고, 기념당 내 장제스의 동상 옆에는 콜라주나 데칼코마니를 전시했었다. 이는 장제스 개인의 기념관으로서 의미를 지우고, 대만의 독립성과 민주화를 기리는 곳으로 바꾸려 한 것이지만 다시 정권이 바뀌면서 이러한 명칭들이 되돌아오는 혼란을 겪는다. 장제스 동상 앞에 서있던 의장대들도 기념관 앞 광장으로 내려와 교대식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35여 년 전인 1989년에 대만의 이러한 변화를 예측하기는 어려웠다. 30년이라면 보통 1세대가 바뀌는 시간이다. 그 30년 이후 중국도 대만도 우리나라도 많이 바뀌었다. 천안문 사태 때 자유 대신 사회 안정을 선택한 중국은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급성장해서 세계적인 대국으로 올라섰지만, 미국의 견제를 받고 주춤거리는 상황이다. 대만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미국과 밀착해서 겅제와 기술을 발전시켜 지금은 반도체와 정보기술(IT)로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부국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장개석으로 대표되던 국민당의 권위주의적인 정책이 바뀌었고, 잃어버린 대룩 고토를 찾는다는 목표도 대만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해 이제는 대만 독립 쪽 길을 추구하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가 중국과 수교하는 과정에서 대만 쪽에 섭섭하게 한 역사가 있지만 이제는 과거의 일이고 한국과 대만 두 나라 국민은 연간 수백 만 명이 서로를 방문하는 그런 친밀한 사이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화 시대로 옮겨가면서 사회적인 갈등도 많았던 것이 대만과 비슷하다. 다만 우리는 여전히 남북이 대립하며 서로의 문이 닫혀 있지만 중국과 대만은 서로의 문을 열어놓고 교류를 하고 있다. 그것이 중국과 대만이 서로 공존하는 지혜라면 우리는 그것이 아쉬운 것이다. 대만에 와서 장개석을 다시 만나보며 중국과 대만 사이의 지나간 역사를 이렇게 한 번 되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