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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엔카의 여왕 미야코가 퇴계 후손이었다네

미야코 하루미와 이춘미, 이 뛰어난 여가수는 한국의 딸이자 일본의 딸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332]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이웃나라 일본의 연말은 대표공영방송인 NHK의 홍백가합전이란 프로그램으로 떠들석하다. 1953년 NHK-TV가 개국하면서 시작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져 온 대형 호화 프로그램으로 남녀 가수들이 홍팀(여성)과 백팀(남성)으로 나누어 경연하는, 가수들의 편 먹기 가요대항전이다. 일본인 가수들이 여기에 출연하기 위해 서로 경쟁을 벌였다는 이 프로그램의 연속 출전기록은 엔카 가수 이츠키 히로시(五木ひろし)로 50회다.

 

여성 가수들이 속한 홍팀에서는 엔카의 여왕이며 일본의 국민가수로 존경을 받는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가 13회 연속출장 기록을 세웠다. 그런데 이 전설적인 미소라 히바리의 기록을 뛰어넘어 20회 연속 출연한 여성 가수가 있으니 바로 미야코 하루미(都 はるみ)다. 미소라를 능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의 오랜 인기를 누렸던 이 여성가수는 1948년 생으로 미소라보다도 11살이 아래이기에 올해로 77살인데 이 여성가수 아버지가 한국인, 곧 그녀도 한국인이란 사실을 우리는 잘 모르고 있다.

 

일본 언론에 공개된 그의 부친은 이종택(李鐘澤 1904~1987)으로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일본 비단의 직포공장에서 기술을 배우며 일하다가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 전통 직조의 본산인 교토의 니시진(西陣)이란 곳에서 기모노의 허리를 감는 오비(帯)를 짜는 소규모 직물공장을 운영하였고 이때 공장에서 함께 일하던 일본 여성 기타무라 마츠요(北村松代, 1919~2005)를 만나 연애 끝에 결혼하여 1948년 2월 22일 장녀가 태어났다.

 

 

노래 등 예능을 좋아한 그의 어머니 영향으로 딸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음악학원에 다니는 등 예능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교토시립 카라쿠(嘉樂)중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았을 때 자신의 본명이 이춘미(李春美)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본에서 아버지는 귀화하지 않고 한국 이름과 성을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다. 딸은 어머니의 성을 따서 ‘기타무라 하루미’(北村春美)로 자라다가 1964년 17살의 나이에 콜롬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제14회 가요콩쿠르에서 우승하여 곧 ‘곤란할 거예요’(困るのことヨ)라는 노래를 녹음해 미야코 하루미란 이름으로 데뷔한다. 미야코(都)는 그가 자란 교토를 뜻하는 말이다.

 

 

같은 해 10월에 동백꽃으로 유명한 '이즈섬(伊豆大島)'을 소재로 한 ‘아가씨 동백꽃은 사랑의 꽃’(アンコ椿は 恋の花)이라는 노래를 발표한 것이 일본 열도를 흔들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고 이듬해인 1965년 발표한 ‘눈물의 연락선’(涙の連絡船)이 155만 장의 음반 판매를 기록하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그해 연말 일본 가수의 꿈의 무대인 제16회 NHK 홍백가합전에 출장한다. 이후 1984년까지 20년 연속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울 정도로 인기 정상의 엔카(演歌) 가수가 되었다.


 

 

그런데 딸이 한창 인기가수가 되어 유명해지자 그의 어머니가 1969년 11월 <주간 평범>이라는 잡지에서 인터뷰를 통해 "내가 조선인과 결혼하였기 때문에 딸 하루미가 어린 시절부터 극심한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다."라면서 "이러한 세상이기에 딸을 인기가수로 키워내고 싶었다."라고 딸이 재일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었다. 그런데 7년 후인 1976년 미야코 하루미가 그동안 불러온 전통적인 엔카와 다른 감성의 노래 ‘북쪽의 집에서’(北の 宿から)를 발표하여 앨범이 143만 장이나 팔려나가고 이 노래가 그 해 제18회 일본레코드 대상의 수상곡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산케이신문(産業経済新聞)>에서 발행하는 <주간 산케이(週刊産經)>에 ‘하루미의 아버지는 일본인이 아니다.’ ‘이러한 하루미에게 일본의 대표적인 상을 줄 수 없다.’라는 기사가 실리고 이에 동조하는 여론이 들끓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최고를 두고 다른 노래를 줄 수가 없어서 결국 ‘북쪽의 집에서’는 일본 레코드 대상을 받았지만 충격을 받은 미야코 하루미는 가수 생활을 그만두려고 했다고 한다. 이때 ‘미야코 하루미’에게 다가온 가수가 인기 최정상이며 엔카의 여왕인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1937-1989)였다.

 

 

미야코보다 11살 위인 미소라 히바리는 미야코에게 ‘나도 힘든 일이 늘 많았다.’, ‘기죽지 마!’라는 격려를 날렸다고 한다. 저널리스트 출신으로 현재도 참의원 의원인 아리타 요시후(有田芳生)가 그의 논픽션 《歌屋 都はるみ(노래쟁이 미야코)》에서 밝힌 내용이다. 미소라 히바리의 격려로 다시 마음을 잡은 미야코는 그해 마지막 날 대망의 <NHK 홍백가합전>에 나와 출전자의 맨 마지막 순서를 장식하는 ‘오토리’(大トリ)에 선정되었고 그 뒤에도 계속 출전한다.

 

그런데 일본 대중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NHK 홍백가합전>의 역대 순간 최고 시청률은 1984년 제35회 홍백가합전 때다. 올해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겠다고 한 미야코 하루미가 출전하여 ‘부부 고갯길’(夫婦坂)이란 노래를 부르던 시점에 시청율이 84.4%까지 올라갔다. 당시 미소라 히바리는 남동생의 조직폭력단 연관 사건으로 홍백가합전에 출전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종합 사회를 맡았던 아나운서가 생방송 중에 얻은 이 경이적인 시청률 기록을 발표하면서 ‘미야코 하루미’를 ‘미소라 히바리’로 잘못 호명한 일이 일어나 다음 해 그 아나운서가 오사카지국으로 좌천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인기 절정의 상태에 있던 그녀는 36살의 나이인 1984년에 ‘보통의 아줌마가’ 되겠다며 은퇴를 선언한다. 이에 놀란 미소라 히바리는 "너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니 꼭 행복해야 한다."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무대를 떠난 미야코 하루미는 1987년부터 프로듀서가 되어 신인가수를 발굴하였고 이때 우리나라 가수 김연자(金蓮子. 1959~)의 프로듀서가 되어 일본 가요계에 큰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1989년 6월 미소라 히바리가 세상을 떠나자 가장 존경하던 선배이며 늘 격려해 준 미소라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다시 가수로 돌아온다.

 

그러고는 활동을 계속하다가 2015년 11월 24일 단독 콘서트를 중지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대중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있고 이따금 동북 지방을 다닌다는 소식만 단편적으로 들려온다고 미야코 하루미의 삶를 추적해 온 이일영씨(미술사업가, 칼럼니스트)가 전한다.

 

 

일본 가요사에서 가장 위대한 국민가수로 추앙받는 미소라 히바리는 1989년 6월 24일 신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일본 정부가 수여한 가장 명예로운 국민영예상(国民栄誉賞)을 추서 받았다. 또한, 일본 최대 잡지 문예춘추가 특집을 통하여 "전후 폐허의 어둠에서 일본이라는 주식회사를 만든 국민과 함께 그 사가(社歌)를 부른 가수 미소라 히바리"로 평가하였다. 곧 어려운 시기 일본 국민에게 큰 위안을 준 가수라는 뜻이다.

 

그런 미소라 히바리도 생전에 재일한국인이라는 소문으로 매우 힘들었는데 공개적으로 이 사실이 거론된 적은 없고 본인도 이에 대해 말한 적이 없기에 미소라를 사랑하는 많은 일본인들은 이 문제가 공개적으로 거론되지 않은 데에 안심하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소라가 한국인이란 보도가 나오면 일본의 주요 언론들이 대거 나서서 반박 기사를 길고 상세하게 내곤 한다. 일본의 연예인, 스포츠 스타 가운데 한국계가 많지만, 그 사실을 밝히기를 꺼리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이를 인정하는 순간부터 국민감정을 선동하려는 세력들 때문에 인기가 급락하기 때문이다.

 

사실 NHK의 홍백가합전에 가장 많이 출장한 이츠키 히로시(五木ひろし)도 미쓰이 광산 기술자였던 한국인 아버지와 후쿠이현 출신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한국 이름은 이화부(李和夫)라고 하는 주장, 일본으로 귀화하면서 이수부(李数夫)로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확인해 주지 않는다. 미야코 하루미와 동갑인 그는 미야코에 이어 미야코가 발탁된 1년 뒤인 1964년 제15회 컬럼비아 전국 가요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1965년 데뷔하여 일본 남성 가수 가운데 정상의 스타가 되었다.

 

그런데도 미야코 하루미만은 자신이 한국인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히바리가 세상을 떠난 뒤 1989년 7월 우리나라 주간여성 잡지에 "미소라 히바리 그는 한국인이었다."라는 특집기사가 실렸는데 이는 작곡가 손목인(1913-1999) 씨가 미야코 하루미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이야기가 바탕이 된 기사다. 하루미가 생전의 미소라 히바리와 마음으로 가까웠고 그를 잘 알기에 손목인 씨에게 이런 말을 털어놓은 것으로 보인다.(손목인 씨는 이종택 씨보다 9살 적은데 고향이 같은 진주였다. 그러기에 손목인 씨는 이종택 씨와 그의 딸 춘미와도 가까웠고 같이 고향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미야코 하루미가 한국인이고, 그의 성이 이(李) 씨인 이춘미였다는 사실은 이렇게 저렇게 알려져 있는데, 놀라운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가 바로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퇴계의 후손이라면 진성이씨(眞城 李氏)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엄청난 비밀은 1960년대 하루미의 아버지 이종택 씨와 사업상 자주 만난 황 아무개 사장을 통해 밝혀진다.

 

황 아무개 사장은 아버지 이종택 씨가 왕성하게 사업을 하던 1960년대 일본 직포의 본고장인 교토 니시진에서 염색일에 종사하였다고 한다. 이종택 씨는 기모노의 허리를 감는 오비(帯)를 짜는 소규모 직물공장을 운영하였다. 일본 전통의상은 직포가 물론 중요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염색이 있어야 하기에 황 사장은 사업상 이종택 씨와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다. 황 사장은 의령 출신인데 의령과 진주는 옆 동네니 비록 한참 아래 연배지만 두 분이 더 친해질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종택 씨가 자신이 퇴계의 후손이라고 밝혔다고 황 사장이 밝힌 것이다. 그리고 황 사장의 아들이 이종택 씨를 통해 서울에 사는 퇴계 집안의 여성과 선을 본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럴 정도라면 미야코 하루미가 퇴계 후손이라는 말이 더욱 확실시된다고 하겠다.

 

일본에서 활동한 최고 인기의 엔카 가수인 미야코 하루미가 한국인이라는 것도 놀라운 것인데 더구나 우리나라 최고의 선비인 퇴계 이황의 후손이라고 하면 미야코의 아버지가 일본에서 살면서 그의 성(姓)과 이름을 한국식으로 고수해 온 충분한 이유가 된다. 미야코의 모친이 한국인과 결혼해서 미야코가 자랄 때에 주위로부터 박해와 멸시를 받는 등 고생이 많았다고 하는 것도 그의 부친이 자신의 뿌리를 굳건히 지켜온 데 따른 것이란 추론도 가능하다.

 

이종택 씨가 진성이씨이고 퇴계의 후손이라면 어떻게 애초에 진주에서 살았을까를 생각해 보면 퇴계가 살던 16세기 후반에는 경북 안동 영주 일원에서 후손들이 살았겠지만, 세월이 더 지나고 세대가 내려가면서 생계를 위해 타향으로 나간 사람들도 있었고, 실제로 진성 이씨 집안 가운데에는 남해 일원에 정착한 분들의 파(派)가 있기에 아마도 거기 후손이 아닐까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특히 퇴계는 첫째 부인 처가가 의령이고 의령엔 퇴계의 둘째 아들 채(寀)의 묘소가 있다. 퇴계도 일찍이 30대 초반에 처가 마을인 의령 일대를 한 달간 다녀가기도 해, 의령이나 인접 진주에 퇴계의 후손들이 내려왔을 가능성이 높다. 이 문제는 그 집안의 뿌리를 더 확인해 보면 더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미야코 하루미는 그동안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 대해 그리움을 안고 아버지의 고향 후배인 손목인 씨, 같은 한국인 설이 있는 미소라 히바리와 가까웠고, 손목인이 만든 '목포의 눈물'을 아버지가 자주 부르는것을 듣고 자랐을 것이다. 그러기에 레코드 회사가 동양풍 노래를 음반으로 냈을 때 목포의 논물을 포함시켜, 가사는 일본어이지만 목포라는 고유지명을 뫂포라는 발음으로 살려 부른 음반을 남겼다.

 

 

미야코 하루미가 한국인 후예라는 사실이 일찍부터 알려졌기에 1995년 2월 16일 ‘한일 친선협회 중앙회’(회장 김수한)가 한일 국교 정상화 30돌 기념행사로 미야코의 내한 공연을 추진한 적이 있는데 당시 문화체육부에 의해 공연이 불허되었다. 그때는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기 전이라서 일본 대중가수의 국내 공연을 허가할 수 없었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나라에 그녀는 와보지 못했다.

 

너무 늦었고 우리는 그동안 무관심했다. 올해가 한국과 일본의 수교 60돌이었지만 정작 어쩌면 우리가 품어야 했을 재일한국인 가수 미야코 하루미, 아니 한국인 이춘미를 미처 챙기지 못하고 다 지나갔다. 미야코가 퇴계 후손이라는 것을 아버지한테서 들었다면 그녀도 자신의 뿌리인 퇴계의 고향을 찾아 인사를 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공개되지 않았으니 아버지 딸도 자신들의 뿌리를 찾는 일을 할 수가 없었고 그 아버지도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1970년대 일본을 사로잡은 십대 아이돌(idol)로서 우리나라에도 많은 팬을 갖고 있던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惠, 1959~ )는 1980년 연예계에서 은퇴했지만 2002년에 갑자기 동아시아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어느 날 중국 기자들의 회견 요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원래 성(姓)은 양(楊) 씨로서, 양귀비(楊貴妃)의 후손이라고 밝힌 것이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 집안의 족보 등을 제시했다. 중국 언론들은 회견문을 실으면서 큰 관심을 표했다. 양귀비 후손이라는 설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중국인 후손이라는 설을 당당히 밝힐 수 있는 일본 사회. 그러나 이제 우리 한국인 출신도 일본에서 자랑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아니 우리 한류가 세계를 넘어 일본도 덮치고 있고 일본의 젊은이들이 한류를 부러워하는 시대인데 일본의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도 한국인 출신임을 자랑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당연히 우리의 미야코 하루미도 이제는 한국의 가장 저명한 학자 퇴계 이황의 후손이라고 당당히 밝힐 때가 온 것이 아닌가? 우리 한국도 그녀를 품어줄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일본 이름 미야코 하루, 한국 이름 이춘미가 한국의 명문 집안의 후손이라는 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곧 새해다. 지금도 자신의 뿌리를 더 이상 밝히지 않고 일본 동북 지방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을 미야코 하루미도 새해에는 78살이다. 점점 건강이 나빠지는 연배로 들어간다. 더 늦기 전에 아버지한테서, 선배 여가수인 미소라 히바리와 작곡가 손목인 씨, 그리고 자신이 키운 가수 김연자 등을 통해서 조국 한국과 핏줄 이야기를 듣고 가보고 싶었을 한국에 미야코가 밝고 건강한 얼굴로 당당하게 초청받을 수 있을까?

 

그녀가 조국을 찾고 그녀의 뿌리인 경북 안동도 찾아 으뜸으로 존경받는 선비 집안의 후손이라는 긍지를 가질 수 있을까? 그동안 우리가 너무 그녀를 품어주지 않았다. 미야코 하루미와 이춘미, 서로 다른 두 이름의 한 뛰어난 여가수는 한국의 딸이자 일본의 딸로서 한국과 일본의 새 시대를 열어주는 키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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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 인문탐험가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