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짐을 챙긴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방랑벽을 조금은 건드리면서,
세월에 찌든 묵은 때를 벗겨 낸다.
가난에 취해 잠든 아내의 얼굴을 보며,
과연 바하의 선율이 스쳐갔던 얼굴이었을까?
동네가 높아 남보다 달빛을 먼저 받을 수 있다며,
아픈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던 아내여!
어제는 온종일 너의 분신을 잡으려
온 집안을 뒤적거렸지.
술래가 짐을 싸려한다. 나의 유년(幼年)
꼼짝 말고 있거라, 나의 유년
유채꽃밭 가로질러
잉잉거리는 벌통을 아쉬워 돌아보며,
죽어도 못 떠난다던
달 보고 빵을 그리던, 유년
아버지 꿈에서도 그리시던 마지막 이사를 하셨다
실성한 어머님이 퍼 올리시던 바닷물 속에
소라랑, 전복이랑, 미역이랑
그것이 아버지 피이며 살인 줄도 모르면서
노트도 사고, 연필도 사고,
우리 반에서는 처음으로 운동화도 샀다.
“너마저 바다에 빼앗길 수 없다.”
첫 번째 이사가 시작되었고
“형, 홍수가 져도 걱정 없겠다. 우리는 높은데 사니까.”
노아의 방주처럼 서울 변두리를 떠다녔다.
밤새 설레던 꿈은 미지의 세계로 눈을 돌렸지만
잠들지 못한 우리의 영혼을
잠든 아내여, 아는가?
하나씩 얻음으로써 귀찮아지는 자유가 그립지도 않느냐?
살면서 얻은 구속, 그 테두리쯤에서
짐을 싸매는 늘 쓸쓸한 버릇
마지막 이사도 아내와 같이 갔으면 한다.
그때는 장이며, 냉장고며, 텔레비전이며
힘에 부칠 물건도 없이
그저 자유로이
제 고교 동기 강성철 시인이 쓴 <이사>라는 시입니다. 1연을 보면 강 시인이 가난에 취해 잠든 아내의 얼굴을 보며 쓴 시일 거라는 생각이 들지요? 아닙니다. 이 시는 강 시인이 대학교 때 쓴 시입니다. 아마도 강 시인은 자신이 혼인하면 신혼 초에는 이렇게 달동네를 전전하며 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미래의 아내를 생각하며 시를 썼겠지요.
실제로 강 시인은 결혼 전 여친에게 이 시를 보여주면서 청혼하였답니다. 혼인하더라도 당분간은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말하면서요. 요즘같이 경박한 세태에서는 자신 없다며 돌아설 여자들도 많겠지만, 강 시인의 아내는 가난해도 행복하게 살자고 하면서 강 시인의 청혼을 받아들였답니다.
졸업을 얼마 안 남겼을 때 강 시인의 문학동아리 후배가 기념문집을 내자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시는 각자의 성을 합친 문집 《강박관념》에 처음 실렸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한 뒤 금융계로 들어선 강 시인은 1985년 이 시를 제1회 금융인 예술제에 투고했는데, 문학부분 통틀어서 대상을 받았답니다. 심사위원이었던 박재삼 시인은 시 <이사>를 관주(貫珠, 글이나 시문 가운데 잘된 곳에 치던 동그라미)를 쳐주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극찬하였다는군요.
그 뒤 1988년 강 시인은 《문학과 비평》에 이 시를 포함한 열 편의 시를 투고하였는데, 이 시가 신인상으로 당선됩니다. 강 시인은 이때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한 것입니다. 그만큼 <이사>는 강 시인에게는 애착이 가는 시일 것입니다.
<이사> 시를 감상하다 보면 달동네를 전전하던 어린 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특히 강 시인은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면서 초등학교 5학년 때 제주에서 서울로 이사 온 뒤 달동네를 전전합니다. 강 시인은 혼인하기 전까지 족히 15번 이상은 이사를 하였을 것이라고 하네요. 이를 강 시인은 4연에서 노아의 방주처럼 서울 변두리를 떠다녔다고 표현하는군요.
1연에서 시인은 가난에 취해 잠든 아내의 얼굴을 보며, 과연 저 얼굴이 ‘바하의 선율이 스쳐갔던 얼굴이었을까?’ 하며 자문합니다. 꿈 많던 처녀 시절 아내는 바하의 음악을 들으며 지그시 눈을 감고 그 선율에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혼인이라는 현실 앞에서 아내는 언제 바하의 음악을 들었냐며 현실에 부대끼면서 달동네를 떠다닙니다. 이것만 해도 시인의 마음을 아프게 할 텐데, 아내는 동네가 높아 남보다 달빛을 먼저 받을 수 있다며, 시인의 아픈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는군요.
4연의 “형, 홍수가 져도 걱정 없겠다. 우리는 높은데 사니까.”를 보면서는, 저도 어린 시절로 빠져듭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한남동 낮은 땅에 살던 저는 여름 홍수철이면 개울을 거슬러 올라오는 한강물을 피해 옥수동 친척 집으로 피난을 가곤 했지요. 손수레에 최소한의 생존 도구만을 싣고 옥수동 언덕길을 오를 때면 저는 고사리손이나마 아버지를 돕겠다고 열심히 손수레를 밀었습니다. 도착하면 내 또래의 친척 아이는 ‘우리는 높은 데 살아 홍수 걱정 없다’라며 어깨를 으쓱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물이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오면 물이 찼던 곳까지 벽지에 일직선의 금이 그어져 있던 것이 지금도 날카롭게 제 기억을 뚫고 나옵니다. 그리고 동네에는 물이 빠졌지만, 아직 개울은 물을 담뿍 담고 있을 때, 동네 꼬마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물 빠졌다!”라는 소리를 신호로 동네 꼬마들은 바구니를 들고 개울로 달려갑니다. 물이 빠지며 생긴 곳곳의 물구덩이에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둔한 물고기들이 있었으니까요.
3연에서 아버지는 꿈에서도 그리시던 마지막 이사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다음 줄의 ‘실성한 어머님이 퍼 올리시던 바닷물 속에’라는 표현으로 볼 때 아버님은 결국 하늘나라로 마지막 이사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소라랑, 전복이랑, 미역이랑 그것이 아버지 피이며 살인 줄도 모르면서 노트도 사고, 연필도 샀다는 것으로 볼 때에, 아버지는 결국 재기하지 못하고 힘들게 달동네를 전전하셨겠군요. 그렇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주눅 들지 않게 반에서는 처음으로 운동화도 사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와 살을 먹고 자란 놈들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좀 더 해주지 못하는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으니... 갑자기 3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시지요?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마지막 이사도 아내와 같이 갔으면 합니다. 그때는 장이며, 냉장고며, 텔레비전이며 힘에 부칠 물건도 없이 그저 자유로이 한다는데, 그럼 마지막 이사는 이승에서 저승으로의 이사인가? 바하의 선율이 스쳐 갔던 아내의 얼굴을 생각하며 시인은 마지막 이사도 아내와 같이하기를 원하는군요. 그렇겠지요. 인생을 동반하며 기쁨과 슬픔 등 모든 희로애락을 같이 한 부부로서는 마지막에도 손잡고 저승으로 이사 가고 싶을 것입니다.
달 보고 빵을 그리던 유년, 우리의 유년은 이랬습니다. 그때에 견주면 풍족해진 지금의 세대에게는 머리로는 이해되지만, 감각적으로 바로 자신의 피부에 스며들지 못하는 시일수도 있습니다. 강 시인은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끔 차를 타고 가면서 “저기가 아빠가 살았던 데다, 조금 더 가서 여기도, 조금 더 가서 저기도 아빠가 살았던 데다”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애들은 “왜 그렇게 이사를 많이 다녔어? 그냥 살지.”라며 되묻더라는 군요. 허! 허! 저도 반찬 투정을 하는 어린 아들, 딸에게 아빠 어릴 때는 이런 건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고 하면, 아이들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눈을 말똥말똥하던 것이 생각납니다.
강 시인이 이 시를 동기 단톡방에 올렸을 때, 친구들의 느낌은 다 비슷했나 봅니다. 모두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사>에 공감하였으니까요. 시인의 위대함은 이런 건가 봅니다. 강 시인! 아니 성철아! <이사> 잘 감상하였다. 덕분에 나도 어린 시절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그 시절의 아련했던 기억을 계속 쫓아다녔다. 다음에도 우리의 감성을 휘저을 수 있는 시 한 편 또 올려보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