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대한매일신보> 주필은 풍채가 초라한 샌님이나 이상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세수할 때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물을 찍어다 바르는 버릇 때문에 마룻바닥,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가 온통 물투성이가 됐다. 누가 핀잔을 주면 ‘그러면 어때요?’라고 하였다.” 이는 소설가 이광수가 일제강점기 월간잡지 《조광》 1936년 4월 호에서 한 말입니다. 일제를 향해 고개를 숙일 수 없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의 기개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2월 21일) 신채호 선생이 90년 전인 1936년 감옥에서 순국한 날입니다.
선생은 사학자로서는 일제가 식민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작한 식민사관에 맞서서 역사의식을 갖추는 것이 곧 애국심을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인 《독사신론(讀史新論)》과 한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 체계를 수립한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같은 역사서들을 쓰고, 일제의 거짓 학설에 맞서 학문적인 투쟁을 펼쳤습니다. 특히 단재는 “역사는 애국심의 원천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어서 독립운동가로도 뛰어난 활동을 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형성과 국권피탈 이후 가장 큰 한민족 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 조직에 힘쓰고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제조소를 설립하려는 노력도 합니다. 그 뒤 1929년 5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지요. 수감중이던 1935년 그의 건강이 매우 악화하자 형무소에서 출감시키겠다고 했지만, 출감 보증인이 친일파라는 까닭으로 선생은 가석방을 거절한 분이었습니다. 선생이 순국한 오늘 우리는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고 외쳤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