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산타령> 전승에 진력(盡力)하고 있는 방영기 명창의 발표회 이야기를 하였다. 이 종목은 1960년대 말, 국가 무형유산으로 지정된 종목이란 점, 그는 전국 명창대회에서 동(同) 종목으로 대통령상을 받으며 “매해 개인 발표회를 열어 보답하겠다는 결심”을 지금까지 실행해 오고 있다는 점, 어린 시절, 남달리 춤과 소리를 좋아해 이를 배우려 할 때, 집안 어른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자신의 주장을 존중해 준 부모님과 그리고 당대 으뜸 명인 명창에게 배울 수 있었던 계기가 오늘의 자신을 있게 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밖에 국악인으로는 드물게 성남 시의원, 경기 도의원을 지내면서 관련하여 <성남 아트센터 건립>이나, <성남 시립국악단> 창단 등도 끌어냈다는 이야기도 전했고, 현재 그는 국가무형유산 선소리 산타령의 <전승교육사>로 활동하면서 <이무술 집터 다지는 소리 보존회> 회장, <방영기 국악연수원>을 운영하면서 시민들에게 <경기소리>, 특히 <경기 산타령>이 어떤 노래인가? 하는 점을 직접 노래와 강의를 통해, 그리고 무대 위에서 실제의 공연, 등등으로 세상에 널리 확산시키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번 주에는 풍물과 함께 살아온, <남사당놀이>의 지운하 명인 이야기로 이어간다.
지난해 연말, 《국립국악원》 예악당 대극장에서는 원로 예인의 한 사람인, 지운하의 <남사당 놀이> 입문(入門) 70돌을 기리는 대형 공연이 열렸다. <남사당-(男寺黨, 男寺堂)놀이>란 나라가 지정한 무형유산의 한 종목인데, 그 이름에서 남(男)은 남성들로 구성된 연희 단체를 뜻한다.
구성원들은 마을을 돌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과 연희를 펼쳐오던 조직체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러한 조직체가 언제부터 존재해 왔는가 하는 점은 분명치 않다. 그 밖에도 또 다른 단체들의 이름 곧 사당패, 광대패, 솟대쟁이패, 초라니패, 풍각쟁이패, 등등의 이름이 남아 있는 점으로 보아, 과거 조선 시대에는 대중을 상대로 해 온, 다양한 유랑 집단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운하는 자타가 인정하는 국가무형유산의 한 종목, <남사당놀이>의 주역이다. 지난해, 그가 입문(入門) 70년을 맞이하게 되자, 평생을 한길에 정진해 오면서, 함께 호흡해 온 동료들과 그의 후배, 제자들이 기념공연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것도 서울과 인천의 각기 다른 대형 공연장에서 서로 다른 출연자들이 열연하였다는 점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려진 예인생활 70돌을 맞이한 지운하 명인의 공연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해 보기로 한다.
이 공연은 한 예인이 몸담아오던 남사당이란 조직에서 풍물놀이의 상쇠 놀음을 볼 수 있다는 기대 말고도, 선후배들과 함께 짜 나가는 판굿이 무대를 한바탕 멋지게 달굴 것이라는 기대 심리가 크게 작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하나는 지운하와 함께 무대에 서서 열연을 펼치게 될, 우정(友情) 출연자들의 면면(面面)도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생각이다.
지운하와 함께 무대에 오른 출연자들은 남기문의 <비나리>, 김덕수와 함께하는 <앉은반 사물놀이>, 유지숙 명창의 <서도민요>, 오은명의 <살풀이춤> 장사익의 낯익은 가요들로 꾸며진 <소리판> 등등이 객석과 무대를 감동으로 달구어 주었기 때문이다.
지운하, 그는 어려서부터 익힌 풍물가락을 지금도 신명나게 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어렵다고 하는 12발 상모돌리기가 몸에 배어 있어서 그러할까? 그를 만날 때마다 느끼게 되는 점은 그의 걸음걸이나 몸놀림이 전혀 80 노인 같지가 않고, 젊은 사람처럼 유연하다는 인상이다. 게다가 얼굴은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이, 마치 천진난만한 소년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운하의 고향은 인천 중심부의 도화동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 지역 <도화 농악>의 상쇠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찍이 농악을 접하게 되었으며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는 평소에 들어오던 금고(金鼓-쇠, 또는 가죽으로 만든 북) 소리가 더더욱 친근감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레 <학교 어린이 농악단> 일원이 되어 그곳에서 상모를 돌리고, 그러한 경험들이 그를 자연스럽게 풍물명인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기에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라는 말은 그를 두고 하는 말 같기만 하다.
1950년대 말, 전쟁이 끝나고, 모두가 어렵고 힘들게 지내던 시기였다. 정부는 전쟁을 겪으며 삶에 지친 국민을 위로하고,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각 도(道)의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농악경연대회>를 열었는데, 이 대회에 <인천농악단>이 경기도 대표로 출전해서 대상을 받게 된다. 이와 함께 이 단체의 일원으로 참가했던 어린 소년, 지운하는 12발 상모를 멋지게 돌리는 기교를 선보여서 최고의 인기상까지 바ㄸ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인천 <대성목재>의 농악단을 거쳐, 본격적으로 <남사당(男寺黨)>에 입단하게 되고, 그러면서 70여 년 악기를 다루고, <남사당패>가 자랑하는 다양한 기능들을 익히며 지내 온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