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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는 우리나라 농업 발전을 뒷받침하고 있는 농촌진흥청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근에는 커다란 저수지 서호 곧 축만제가 있지요. 농촌진흥청이 여기에 자리 잡은 까닭은 바로 서호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정조는 1799년 화성의 서쪽에 커다란 저수지를 파고 <축만제(祝萬堤)>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곧 <서호(西湖)>라고 이름을 고칩니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풍년을 비손한다는 뜻이고 서호는 화성 서쪽에 있어 부른 이름이지요. “이 농토를 만든 것은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 큰 뜻에서 나온 것인데, 경작자에게 나눠 줄 때는 먼저 아전과 관의 노비로부터 성안의 백성까지 그 힘에 따라 원하는 대로 나누어주라.” 이 글은 화성을 지을 때 있었던 모든 것을 적은 화성성역의궤의 ‘절목’에 나오는 글로써 정조가 왜 서호를 파고 농토를 마련했는지 잘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이때 수원에서 실현된 대규모 수리 시설과 최신 영농방법은 조선후기 농업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런데 농촌진흥청이 2012년까지 전주로 이전 계획을 세우면서 이 유서 깊은 서호도 찬밥 신세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 걱정이 바로 서호 둑길에 버려지다시피 한 축만제 표지석에서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세운 지 200년이 넘은 축만제 표지석은 정조 당시에 세워졌을 것으로 분명한 우리의 문화유적일 텐데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그냥 방치돼 있습니다. 그 반면에 1906년 일제가 세운 “권업모범장”이라는 표지석은 둘레에 울타리까지 쳐가면서 보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민족감정은 안중에도 없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