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68. 기라성 같은 여성들이 구혼장에 몰리다 “52살의 이차손이라는 남자가 아르헨티나 이민 20년 만에 자수성가하여 부자가 되었으나 부인인 아르헨티나 여성과 사별하게 되자 동아일보에 고국의 참한 여성을 신부로 맞이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를 기사로 내보내기가 무섭게 전국의 기라성 같은 여성들이 구혼을 해왔는데 무려 93명의 여성이 응모했다고 한다. 처녀부터 유부녀도 있었으며 동기로는 외로워서, 일거리가 없어서, 외국생활이 좋아 보여서…. 등등이다.” 1962년 3월 2일 자 동아일보에 난 재미난 기사입니다. 지금은 외국으로 시집가려는 여성들이 줄어들었지만 혹시 돈 많은 남자의 구혼장이 기사로 뜬다면 또 1963년 짝이 날지는 미지수이죠. 반면 한국인 남자에게 시집오는 외국인 여성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이 그만큼 살기 좋은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문 기사에 ‘기라성 같은 여성’들이 구혼에 응모했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가 흔히 듣고 쓰는 말이지요. 무슨 뜻일까요?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기라성(綺羅星):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한 별이라는 뜻으로, 신분이 높거나 권력이나 명예 따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1994. 저물어 가는 한 해 ‘우리말 속살’ 들여다보기 - 일본이야기 작가 이윤옥 소장이 쓴 ≪사쿠라훈민정음≫ - 뗑깡부린다는 말이 간질발작을 뜻하는 일본말 “전간(癲)”에서 온 말임을 아시나요? “신토불이”는 일본이 먼저 쓰던 말을 농협이 가져다 쓴 말이고, “수우미양가”는 일본 사무라이 시대의 목 베기에서 나온 말이며, “혜존(惠存)”은 책을 지은이가 상대방을 높여 쓰는 말이 아니라 책을 받는 사람이 읽고 잘 간직하겠다는 뜻임을 아시는지요? 또 “정로환(征露丸)”은 러일전쟁을 하던 일본이 러시아를 정벌한 약이란 뜻으로 쓰이고, “부락(部落)”이란 말은 일본에서 차별받던 천민마을을 가리키던 말이며 그 밖에 서정쇄신, 국립묘지참배, 전지훈련, 수타국수, 후견인, 선착장, 물의를 빚다, 돌풍 불다, 땡땡이치마, 심심한 애도, 동장군 같은 말이 일본말에서 비롯한 것임을 아시는지요? 우리가 평소 아무렇지 않게 쓰던 말들이 일본말에서 나온 것이라니 놀랍습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이런 말을 써온 까닭은 그간 이런 말들이 일본에서 들어온 말임을 알려주는 책이나 기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 국립국어
“나는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이 왈칵 치밀었다. 생전에 고운 옷 한 벌 입지 않으시던 어머님, 설날 아침이 되면 겨우 하얀 외씨버선을 신고 절을 받으시며 세뱃돈을 나누어 주시던 어머님께 꽃버선을 사드리고 싶어서였다.” 이 글은 서상옥 님 수필 중 일부입니다. 버선은 무명·광목 등으로 만들어 발에 꿰어 신는 것으로 한복엔 꼭 필요한 것이지요. 연중 동짓달과 섣달 추위는 매섭기 짝이 없어 지금처럼 훈훈한 아파트나 두툼한 점퍼에 포근한 양말이 없던 시절에는 겨울나기가 수월치 않았지요. 이런 때에 “동지헌말(冬至獻襪)”이라는 풍속이 있었는데 “동지에 만들어 바치는 버선”이라는 뜻입니다. 예전엔 동지부터 섣달 그믐까지 시어머니 등 시집의 기혼녀들에게 버선을 지어 바치려고 며느리들의 일손이 바빠지는데 이를 ‘동지헌말’ 또는 풍년을 빌고 다산(多産)을 빈다는 뜻인 ‘풍정(豊呈)’이라고도 했습니다. 18세기 실학자 이익은 동지헌말에 대해 ‘새 버선 신고 이 날부터 길어지는 해그림자를 밟고 살면 수명이 길어진다.’ 하여 장수를 비손하는 뜻이라 했습니다. 며느리가 손수 도톰한 솜을 넣어 만든 버선을 신은 시어머니는 세상에 더없는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
조선시대 민간음악의 주류를 이루던 삼현육각은 해방 뒤 맥을 이어오던 해금산조와 시나위 명인이었던 지영희(池瑛熙, 1909 ~ 1979) 선생이 세상을 뜬 뒤 그 맥이 끊길 뻔했습니다. 그러던 것을 몇 년 전부터 피리명인 최경만 삼현육각보존회장이 회원들과 함께 어렵사리 공연을 하며 맥을 이어가고 있지요. 이 삼현육각이 무엇일까요? 조선시대 최고의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첩 가운데 무동(舞童)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거기엔 무동이 춤을 추는데 위 맨 왼쪽에 좌고를 치며, 그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장구와 두 대의 향피리(중국에서 들어온 당피리에 견준 우리 고유 피리), 대금·해금이 연주를 합니다. 이런 악기 편성을 삼현육각이라고 하지요. 삼현육각(三絃六角)은 조선시대 궁중무용과 행진 음악, 지방 관청의 잔치, 높은 관리의 행차, 향교 제향 그리고 각 지방에서 신에게 제사 지낼 때 두루 쓰이던 민간의 주류음악입니다. 삼현육각은 무동에서처럼 6명으로 구성되지만. 경기·호남·해서·영남 등 지역에 따라 악기 종류, 편성인원, 음악적 특징, 악곡구성에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요. 삼현(三絃)이라 해서 3대의 현악기를 뜻하지는 않으며, 삼현육각이 주로 연주하는 음악이
동지는 24절기 중 스물두 번째이며, 팥죽을 쑤어먹는 명절입니다. 동짓날 팥죽을 쑨 유래는 중국의 ‘형초세시기’에 나옵니다. ‘공공씨’의 망나니 아들이 동짓날 죽어서 전염병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평상시에 팥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전염병귀신을 쫓으려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았다고 하지요. 동지가 동짓달 초승에 들면 애동지, 중순이면 중동지, 그믐께면 노동지라고 합니다. 애동지에는 팥죽 대신 팥 시루떡을 쪄서 먹었는데 요즘은 가리지 않고 팥죽을 먹습니다. 팥죽을 쑤면 먼저 사당에 차례를 지낸 다음 방과 장독, 헛간 등에 한 그릇씩 떠다 놓고, “고수레!”하면서 대문이나 벽에다 죽을 뿌립니다. 붉은 팥죽으로 악귀를 쫓는 의식이지만 한편으론 겨울에 먹을 것이 부족한 짐승들을 배려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 식구들이 팥죽을 먹는데 마음을 깨끗이 씻고, 새해를 맞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동짓날은 만물이 회생하는 날'이라고 하여 고기잡이와 사냥을 금했다고 하고, 고려와 조선 초기의 동짓날에는 어려운 백성이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왕실에서는 한 해의 시작으로 보고 새해 달력을 나누어주었는데, 이러
“경성시의 중앙에서 육혈포를 가진 강도단이 발견되얏다! 년말이 되자 경향을 물론하고 절도와 강도가 횡행한다-하는 소식이 새삼스럽게 사람의 마음을 불안케 한다. 도적이야 어느 때인들 업섯으리오 만은 년말이 되야 더욱 심하게 됨은 무슨 까닭이며 이로 인하야 인심이 불안하게 된 것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위 내용은 1923년 12월 22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연말의 불안(年末의 不安)”이라는 기사입니다. 육혈포란 권총을 뜻하는데 서울 한복판에 권총 든 강도단이 나타난 것은 경찰 단속이 엄중치 못해서도 아니고, 사람 마음이 전보다 더 악해진 것도 아니며, 오직 생활이 극도로 불안해진 까닭이라고 말합니다. 생활의 불안은 1923년 당시 흉년에 이은 일제의 쌀 수탈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1911년부터 시작된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인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생산된 쌀 대부분은 일본으로 빼돌려졌기에 조선인의 고초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견주면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저물어 가는 경인년 길목에 서서 헐벗고 굶주린 이웃이 없는가를 되돌아보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바야흐로 동장군(冬將軍)의 계절입니다. 경기도 포천에서는 동장군 잔치(축제)를 어느새 7회째나 열고 있다고 하지요. 한겨울 몹시 추울 때 ‘동장군이 맹위를 떨친다’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되는데 한자로 ‘冬將軍’이라고 쓰는 이 말은 대체 어디서 온 말일까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동장군을 “겨울 장군이라는 뜻으로, 혹독한 겨울 추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짧게 설명해 놓았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지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알 수가 없는 풀이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말은 일본에서 쓰기 시작한 말을 들여 온 것으로 일본국어사전 다이지센大辭泉에는 “ふゆしょうぐん【冬將軍】:《モスクワに遠征したナポレオンが、冬の寒さと雪が原因で敗れたところから》冬の嚴しい寒さをいう語。また、寒くて嚴しい冬のこと。”로 되어 있는데 번역하면 “후유쇼군, 모스크바를 정복(원정)하러 간 나폴레옹이 겨울 추위와 눈으로 패한 데서 유래한 말로 겨울 혹한을 이르는 말. 심한 겨울 추위 그 자체.”로 번역됩니다. 다시 말하면 동장군은 1812년 러시아-프랑스 전투에서 혹한의 날씨로 진 프랑스 군대를 보고 영국기자가 말한 ‘general frost’를 일본에서 번역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동장군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이라는 사설을 발표했던 하지만 뒤에 친일파로 변절하여 독립유공자로서 받았던 훈장이 취소된 장지연이 쓴 ≪일사유사(逸士遺事)≫ 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중인을 비롯한 하층민들의 전기를 모아 엮은 것으로 기인(奇人)·화가·문인·효녀 같은 다양한 인물들을 소개하였는데,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려는 흔적이 엿보입니다. 그 일사유사에 김학성이라는 사람의 어머니에 대한 일화가 실려있지요. 어머니는 비 오는 어느 날 처마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메아리치는 듯 약간의 울림이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그 처마 밑을 파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엔 커다란 가마솥이 나오고 가마솥 안에는 은이 가득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난리가 많아서 재물이 있는 집에서는 그것을 은으로 바꿔 땅속에 묻어두는 것이 예삿일이었다지요. 그래서 할 일 없는 사람을 빗대어 “강화섬에 가서 빈산이나 뒤져라.”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어머니는 이를 다시 묻어둔 뒤 그 집을 팔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결국 조그만 오막살이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남편 제삿날 식구들을 불러놓고 그간의 사정들을 말했지요. 그리곤 왜 그랬는지 묻는 식구들에게 어머니는 “재산은 곧 재앙이다.
“매년 가을이 되면 관에서 대장을 가지고 나와 그 과일 개수를 세고 나무둥치에 표시를 해두고 갔다가 그것이 누렇게 익으면 비로소 와서 따가는데, 혹 바람에 몇 개 떨어진 것이 있으면 곧 추궁하여 보충하게 하고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으면 그 값을 징수한다. 광주리째 가지고 가면서 돈 한 푼 주지 않는다. 또 그들을 대접하느라 닭을 삶고 돼지를 잡는다.” 위 글은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서 나오는 내용입니다. 귤과 유자나무를 가진 백성에게 벼슬아치들이 횡포를 부린다는 얘기입니다. 이에 그 백성은 몰래 나무에 구멍을 뚫고 후추를 집어넣어 나무가 저절로 말라죽게 하고, 그루터기에서 움이 돋으면 잘라버리고 씨가 떨어져 싹이 나면 보이는 대로 뽑아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관의 대장에서 빠지려고 하는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혹독한 세금은 국민의 생산 의욕을 떨어뜨리고 심하면 당시 제주도 백성처럼 세금 내기 싫어 키우던 나무마저 죽여버리는 것이 백성의 마음 곧 민심입니다. 다산은 제주도 관리의 횡포를 보며 이것이 그치지 않는다면 몇십 년 안 가서 우리나라 귤과 유자는 씨가 마를 것이라고 걱정하지요. 지금이야 제주도는 귤 특산지가 되어 있지만 하마터면 우리가 쉽게 사먹을
"백결 선생은 신라 때 남산 아래 마을에 살았던 사람이다. 백결이란 이름은 가난하여 언제나 누덕누덕 기운 누더기를 걸치고 다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지어 부른 이름이다. 백결 선생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거문고로 마음을 달래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해 섣달 그믐께 이웃에서는 절구에 떡을 찧는 소리가 한창인데 백결 선생 집에서는 떡쌀이 없어 떡을 찧을 수가 없었다. 부인이 슬퍼하며 정월 초하루를 무엇으로 맞을 것인가 하고 한탄했다. 그러자 백결 선생은 거문고로 떡방아 소리를 내어 부인의 슬픔을 달래었다."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글입니다. “쿵덕 쿵덕” 수확이 끝난 뒤거나 명절을 앞둔 때 가정에서는 곡식을 빻는 공이질 소리가 구성집니다. 이때 쓰는 절구는 사람 힘으로 곡식을 찧거나, 양념을 빻을 때, 또는 메주를 찧거나 떡을 찧을 때 쓰는 것입니다. 지방에 따라 도구·도구통·절기방아·방애(제주도)라고도 합니다. 절구는 재료에 따라 나무절구·돌절구·무쇠절구가 있지요. 절구는 보통 두 사람이 맞공이질을 할 수 있도록 두 개의 절굿공이가 딸려 있습니다. 절굿공이는 대개 긴 나무를 깎아 매끄럽게 만드는데, 손잡이가 되는 가운데 부분은 가늘게 하고 양쪽 끝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