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은 그런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간혹 앞뒤가 안 맞을 때도 있을 겁니다.” 자신이 모셔야 하는데 여의치가 않아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이 안스러운듯 독립운동가 이병희 여사의 며느님은 상냥한 목소리로 어머님의 여러 근황을 알려주었고 약도 대로 요양원을 향하는 마음은 설렘과 동시에 건강상태 걱정이 앞섰습니다. 이 시대의 여성독립운동가 중 몇 안 되는 생존자이신 이병희 애국지사를 만나러 부평 갈산동에 있는 <사랑마루요양원>에 찾아가던 날은 막바지 장맛비가 쏟아져 우산을 써도 바짓가랑이가 젖을 만큼 퍼부어대던 날이었습니다.
‘사랑은 마주 보며 이루어진다.’라는 예쁜 이름의 ‘사랑마루’ 요양원 4층 창가 침대에서 글쓴이를 반갑게 맞이하는 이 여사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릴 듯 몸이 많이 수척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정신만은 새벽녘 맑은 별처럼 또렷했습니다. 할머니는 글쓴이가 내민 명함의 작은 글씨를 한자도 틀리지 않고 또렷하게 읽어 내려가면서 ‘돋보기 없이 글을 읽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1918년생이며 올해로 95살이라는 것과 칠십여 년 전의 항일독립운동 이야기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씀해주시는 모습이 마치 지리산 도인을 만난 듯했습니다.
이병희 여사의 할아버지 이원식 독립지사는 동창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을 이끈 독립운동 1세대이며 아버지 이경식 애국지사는 1925년 9월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암살단 단원으로 활약했습니다. 이러한 굳건한 민족의식을 이어받은 이 여사는 동덕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열여섯 살이던 1933년 5월 경성에 있는 ‘종연방적(鍾淵紡績)’에 들어가 500여 명의 근로자를 모아 항일운동을 주도하다 잡혀 4년 반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모진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그 뒤 1940년 북경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한 뒤에는 동지 박시목ㆍ박봉필 등에게 문서를 전달하는 연락책을 맡아 활동하던 중 1943년 국내에서 북경으로 건너온 이육사와 독립운동을 협의하다 그해 9월 일경에 잡혀 북경감옥에 구금되었고 이어 잠시 국내로 잠입하였던 이육사도 잡혀 함께 옥살이를 합니다. 그러나 이병희 여사가 1944년 1월 11일 석방된 뒤 며칠 만에 1월 16일 이육사는 옥중 순국을 하게 되고 유품과 사체 수습을 이병희 여사가 맡게 되지요.
“그날 형무소 간수로부터 육사가 죽었다고 연락이 왔어. 저녁 5시가 되어 달려갔더니 코에서 거품과 피가 나오는 거야. 아무래도 고문으로 죽은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출옥할 때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이 여사는 말합니다. 이 여사는 육사의 시신을 화장하여 가족에게 넘겨 줄 때까지 유골 단지를 품에 안고 다녔으며 혹시 일제가 훼손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해서 심지어는 맞선을 보러 가는 날도 육사의 유골을 품에 안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광야’ ‘청포도’ 같은 육사의 주옥같은 시는 이병희 여사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병희 여사는 지난 50여 년간 자신의 독립운동을 숨기고 살아야했습니다. 이른바 ‘사회주의계열’ 여성 독립운동가로 낙인 찍혀 조국 광복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도 그늘진 곳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1996년에 가서야 겨우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되는데 이렇게 숨죽이며 살았던 여성 애국지사로는 이효정 여사도 있으며 이효정 여사는 이병희 여사의 친정 조카입니다.
대담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구순의 애국지사는 푸른 실핏줄이 선연한 앙상한 손으로 글쓴이의 손을 꼬옥 움켜쥐며 “너는 끝까지 나라를 지켜라. 깨끗이 살다가 죽거라”라고 하시던 아버지의 유언을 전하면서 “젊은이들이 독립운동정신을 잊지 않고 훌륭한 나라를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라는 당부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요양원 벽면에는 할머니가 색칠한 예쁜 꽃 한 송이가 방긋이 웃고 있었습니다.
이병희 여사의 요양원 방문은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이윤옥 부위원장과 함께 했으며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에 일본이야기를 쓰는 시인인 이 부위원장은 이병희 애국지사를 포함한 독립운동여성들을 다룬 시집 <서간도에 들꽃 피다>를 펴내고자 마무리 작업 중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