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오키나와는 춤과 노래의 섬이라고 한다. 일본 본토와 바다로 막혀 있는 지리적 조건, 아열대에 속한 자연환경, 또한 거듭 되는 외세의 풍랑을 겪어온 역사 속에서 오키나와의 춤과 노래는 자연스레 무르익어 온 것이라고도 한다.
1609년 일본 사츠마번(薩摩藩)의 침공을 받은 이래 현재의 일본 행정구역 단위인 43개현(縣) 가운데 마지막 43번째 현이 되기까지 오키나와는 동남아시아를 대상으로 중계 무역을 담당하던 해상국가 류큐왕국(琉球王國)으로 번영하던 나라였다.
그러던 것이 태평양 전쟁 때는 미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오키나와전(戰)이 벌어져 당시 오키나와 주민들은 큰 희생을 치러야 했으며 1972년까지 미군정하에 놓이기도 했다. 그 뒤 일본에 복속된 지금에도 오키나와는 대규모 미군기지 시설이 들어서 있어 춤과 노래보다는 미군기지 땅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많다.
오키나와의 노래와 춤은 오키나와를 중심으로 한 여러 섬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전통적인 춤과 노래의 출발은 마을신(神)에 대한 기원에서 비롯된다. 마을의 안녕과 재난을 막고 풍작을 기원하며 감사하는 노래로 출발한 민속 예술은 사자춤, 봉오도리 따위가 있다.
이들 춤에 빼놓을 수 없는 악기로는 샤미센(三味線)이 있는데 중국에서 샤미센이 건너오면서 오키나와 예술은 북 따위의 리듬악기 시절보다는 훨씬 풍요로워지는데 샤미센의 등장은 오키나와의 제사 의식인 오모로(おもろ)에 사용되어 궁중예술에 영향을 주게 된다. 류큐왕조 시절 임금이 즉위할 때마다 중국에서는 관(冠)을 내렸는데 그때 책봉사를 환영하고 나라를 일으키는 축하연을 열어서 연희의 여흥으로 춤을 추었다. 이를 오칸센오도리(御冠船踊)라 한다.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세계 최장수 도시로 알려진 휴양도시 오키나와 땅을 밟은 것은 이십여 년 전이다. 류큐왕국의 화려한 왕조시대를 접고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와 말까지 일본에 내어 준 채 류큐인에서 일본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오키나와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만자모 해변의 수려한 풍광이 주는 안락과 휴양보다는 마부니 언덕(摩文仁)에 세워진 오키나와전투 희생자 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꽃다운 청춘의 나이에 식민지 조선 청년 1만여 명은 일본의 전쟁놀음에 휘말려 이곳 오키나와에 징병으로 끌려와 고귀한 목숨을 잃었다. 그들을 기리며 오래도록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던 마부니동산에서 눈시울을 적시던 기억이 새롭다.
풍광이 수려한 오키나와는 어디를 가나 아름다운 해변과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탄성을 지르는 곳이지만 태평양전쟁의 흔적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는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오키나와의 춤과 노래는 흥겹기보다는 어딘지 모를 우수에 젖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나만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