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서한범 문화전문기자] 속풀이 <106>에서는 판소리의 각 유파(流派)를 형성하게 되는 배경이나 기준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에 따라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로 구분하고 있는데 동편제는 섬진강 동쪽 지역의 소리로 웅건청담하여 정중하고 온화하면서도 씩씩한 소리제인데, 창법에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선천적인 음량을 소박하게 그대로 드러내는 특징을 지닌 소리라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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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는 섬진강 서쪽지역에서 불린 유파로 소리의 특징은 애원처절하며, 대체로 정교하면서 감칠맛이 나고 장단의 변화와 장식음의 구사가 특성이다. 그리고 중고제는 경기·충청 지역에서 불린 소리로 동서 소리의 중간적인 위치를 지닌 소리제를 말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이러한 판소리의 유파 형성은 19세기 초반부터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강산제 심청가’는 원래 서편제 ‘심청가’의 한 가닥으로 박유전의 한양 생활 이후에 다듬어진 ‘심청가’를 특히 강산제라고 부르고 있는데, 대원군이 박유전의 소리를 듣고‘네가 제일 강산이다.’라고 하였다는 설과 그가 말년에 보성의 강산리에 은거하였기에 강산제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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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산제를 만든 박유전비 |
판소리의 주 수요자들은 일반 민중들이었다. 그런데 ‘김세종제 춘향가’의 음악적 특징 가운데 하나라면 양반층 청중의 취향을 반영하여 판소리의 사설을 점잖은 형태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종래의 다듬어지지 않았던 내용들은 양반들의 가치 기준을 따르는 내용으로 변화시켰으며 그 형식도 시창(詩唱)이나 우조(羽調) 틀의 음악을 삽입하는 등 양반 문화의 우아한 미의식을 노래 속에 반영시켰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19세기 후반, 양반들이 판소리의 수요자로 등장하면서부터 변화되었다고 보며 ‘김세종제 춘향가’의 경우 이 같은 변화의 전범이 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고급예술이든, 대중예술이든 간에 예술행위는 청중의 취향과 선택이라는 미의식의 작용에 따라 그 취향이 대조적이고 다양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유영대 교수는 판소리가 기록의 대상이 된 것은 판소리의 청중이 양반층으로 확대되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고 하면서 일반 민중을 대상으로 마당에서 초립을 쓰고 소리할 때의 광대는 그 기반이 민중적인 것이기에 당연히 그 사설이 포괄하는 내용도 민중적일 수밖에 없고 감정표현도 직설적인 것이었으며, 계면조야말로 대표적인 민중취향의 미의식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양반들이 판소리의 주요한 청중으로 등장하게 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게 된다고 주장한다. 사대부를 대상으로 하는 방안에서의 공연은, 한 번 소리하면 1년 먹을 것이 생긴다는 증언이 있듯이, 광대의 격이 이전과는 현저히 다른 것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소리는 안방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사설도 일정하게 변모되었다.
서민층에서 즐기던 판소리가 너무 처참하다거나 감정을 격정적으로 토로하는 폐단이 있다고 양반들이 지적하면서, 판소리는 일정하게 감정의 지나친 표출을 자제하는 창법을 구사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동편제 스타일의 창법으로 정형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같은 양반층의 미의식을 존중하여 감정을 과잉되게 노출하지 않고 절제하는 쪽으로 변화하였는데, 시창(詩唱)의 등장이나, 가곡성 우조의 등장은 이 같은 미의식의 반영이라는 본다.
하여튼 보성소리는 전통시대의 판소리 가운데는 가장 완강한, 양반화된 판소리의 미의식으로 짜여 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양반적인 미의식에 의한다면 탈락할 우선순위에 있는 노래는 ‘흥보가’로 보는 사람도 있다. 양반들의 구미에 맞는 소리는 ‘적벽가’, ‘수궁가’ 등이었으며, 이들도 내용을 적절하게 수정하거나 보완하여 양반의 취향에 맞게 수정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소리들을 고집스럽게 지켜온 것이 오늘의 보성소리가 되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민중들의 취향에 영합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우아한 전통의 판소리를 지켜왔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린경제 / 한국문화신문 얼레빗 서한범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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