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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 쓴 허준 고향 어디?

[파주문화통신 10] 옛 장단 땅에서 세상으로 나온 허준묘

 [그린경제=권효숙 기자문산에서 경의선을 타고 가다보면 임진강역을 지나 도라산역으로 갈 수 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위를 철교로 건너면 철조망이 친근한 민통선 지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민간인통제지역이라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무성한 숲과 나무들, 고라니, 멧돼지 등 야생동물들과 이름 모를 풀꽃들, 그리고 그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는 백로, 기러기, 독수리가 보인다.

 
   
▲ DMZ안에 유일하게 민간인이 거주하는 대성동 마을. 판문점 인근에 있다.
 
국내외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분단의 아픔으로만 기억되는 이곳...이곳의 정확한 지명은 경기도 장단군이다. 고려 때부터 도읍지 개성 근교이고, 조선조에도 한양과 멀지 않아, 왕실과 사족들이 거주하거나 사후 문중의 선영지가 많은 곳이다.
 
이곳에는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이 왕건에게 신라를 넘겨주고,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와 결혼해 개성에서 살면서 신라의 도읍지를 그리워 하며 오르던 도라산(都羅山)이 있다. 또한 북쪽에서 비무장지대를 뚫고 온 1,6533땅굴과, 장단콩 두부로 유명한 통일촌, 대성동 자유의 마을, 실향민의 해마루촌이 있다. 그리고 진동면 하포리에 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동의보감>을 저술한 조선 최고 명의 허준이 잠들어 있다.
 
   
▲ 도라산전망대에서 망원경으로 보면 개성시내가 다 보인다.
 
허준(許浚)1539(중종 34)에 출생하여 1615(광해군 7)에 사망한 명의로,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자는 청원(淸源), 호는 구암(龜巖)이다. 할아버지 곤()은 무과 출신으로 경상도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론()도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1574(선조 7)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내의원에 들어간 이후 어의로서 활동하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종공신이 되기도 하였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책임 어의로서 의주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풀려나 광해군의 어의로서 왕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았다. 이후 주로 의서를 편찬하여 대표적인 것이 동의보감의 완성이다.
 
1610년 완성된 동의보감은 총 2525책으로 당시 국내 의서인 의방유취, 향약집성방, 의림촬요등을 비롯하여 중국의 의서 86종을 참고하여 편찬한 것이다. 허준은 이외에도 많은 의방서 등을 증보 개편하거나, 알기 쉽게 한글로 해석하여 간행하였다.
 
동의보감은 한국을 넘어서 이미 해외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267년 전에 일본에서 간행되었고, 중국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으며 최근에는 독일어판·영어판도 출판되었다. 이는 동의보감이 국가와 시대를 초월한 세계적 저술이라는 사실을 대변해준다. 연암 박지원이 중국에 갔을 때 북경의 서점가인 유리창(琉璃廠)에서 팔리는 조선 서적은 동의보감이 유일하더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 판문점
 
이 곳 장단군은 여러 문헌 사료에서 장단현. 임강현. 임진현으로 기록되는데 해방 후 38선으로 갈라지면서 많은 군민들이 북한과의 접경을 벗어나 남하하였고 6.25 전쟁 3년간 상당수의 군민이 남으로 피난 나왔다. 종전(終戰)되기 3개월 전 전선을 고착(固着)시키려는 무렵, 고랑포 전투 등 격전지가 되었고, 휴전이 성립되자 대부분의 군역이 비무장지대 또는 북한 지역에 들어갔으며, 3분의 1정도만이 수복된 상태로 1962년에 파주, 연천군에 폐합되었다.
 
이 지역에 고려시대부터 터를 잡고 살아오던 양천 허씨 집안이 있었다.양천허씨(陽川許氏) 는 고려 목종(穆宗) 때 허원(許元)과 그의 증손 허정(許正)이 예부상서(禮部尙書) 등 관직생활을 하면서 장단에 세거한 것으로 보이며, 그 후 많은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아왔다.
 
   
  ▲ 민통선 안 통일촌 마을
 
해방 후까지 장단군 대강면 정리(篤正里)30, 우근리(禹勤里)66등 동족마을을 이루고 살아왔으나, 지금 이곳은 비무장 지대로서 후손들은 6.25 전쟁 이후 모두 피난을 나와 각지로 흩어졌다. 대강면에서 나온 양천허씨들은 현재 주로 서울에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26가구), 파주와 연천에 각 1가구, 기타지역에 5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은 매년 9월이면 연천군 백학면 백연리 두류봉 최전방 철책선 아래에서 망향제를 올리는데 이곳에서 고향땅이 보이기 때문이다.
 
허준의 고향은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
 
허준은 양천허씨 시조의 11판도좌랑공 관()에서 분파하여 12세손에서 영월공(寧越公) ()로부터 다시 분파된 영월공파 5세손으로서 그의 고향은 지금의 판문점 옆 대성동 부근의 마을이라고 한다(양천허씨 장단군민회 대강면장 허병복씨 증언)
 
허준 선조의 묘소는 우근리를 중심으로 하여 도보로 1시간을 전후로 갈 수 있는 지역에 몰려 있다. 허준의 고향에 대한 연구를 해온 이양재(재미 고문서연구가) 씨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여러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그의 고향은 장단군 대강면 우근리임이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양천허씨 시조 허선문(許宣文)은 고려 태조 때의 인물로서, 837년에 태어나 공암현(현재의 양천·강서 지역)에 살았고,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할 때 많은 군량미를 공급하여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의 아들 현()이 소부감(나라의 중요 물건보관창고를 관리하는 관청)의 소감(4)을 역임했고 손자 원()이 예빈성(국빈을 접대하는 관청)의 경()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그의 아들부터는 개성에 기반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개성과 인접한 장단 지역에서 양천 허씨들은 집성촌을 이루어 살았고, 허준의 직계 조상들의 묘소는 대체로 개성 주변과 장단에 조성되었다. 허준의 모친과 허준, 허준의 직계 자손 거의 대부분은 장단 지역에 묻혀 있다.
 
   
▲ 허준 묘역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어떤 이들은 허준의 본관이 양천이므로 그의 고향이 경기도 김포지역 가양동 공암(지금의 강서 양천구 포함)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1930년도의 국세조사를 집대성한 <조선의 성(朝鮮: 1934)>을 보면 경기도 김포지역(지금의 강서·양천구 포함)에는 허씨 집성촌이 하나도 없었다. 더군다나 공암 주변은 1920년대까지도 집이 전혀 없었다.
 
의성 허준묘가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2년 이양재씨는 한 통의 간찰을 입수했다. “717일 허준배(許浚拜). 비가 와서 길을 떠나지 못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허씨대종회를 찾아가 종친회 족보를 뒤적여 준()자를 썼던 사람을 찾던 중 한국전쟁 이후 실전된 허준의 묘가 장단 하포 광암동 선좌 쌍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 1991년에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에서 발견된 허준 묘
 
이에 그는 허준 선생의 묘소를 찾기 위해 일제시대 토지대장을 확인하던 중 19919월 하포리에서 허준의 종손인 허형욱(1924~?)의 이름을 찾았고 군부대의 협조를 얻어 허씨들이 모여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옛 땅을 찾았다. 하지만 이미 무덤이란 무덤은 모두 도굴돼 있었는데 그 중 한 무덤이 유독 눈길을 끌었고 무덤 주변을 파던 중 두 쪽으로 동강난 비석이 나왔다. 비석에 명문이 새겨져 있었고 내용은 陽平○ ○聖功臣 이었는데 바로 양평군 호성공신 허준이었다. 이렇게 허준묘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 땅 속에 있다 발견된 허준 묘비. 위쪽은 깨어져 나가 글자가 보이지 않지만 아래쪽에 ‘陽平○ ○聖功臣 ○浚’글자가 보여 허준묘로 확인되었다.
 
 
묘역은 약 50평 규모로 우측 묘는 부인 안동 김씨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들 두 묘 위쪽으로 허준의 생모 묘로 추정되는 묘가 한 기 더 있다. 묘소에는 묘비, 문인석, 상석, 향로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역 아래엔 ()의성허준기념사업회에서 201151일에 세운 증 보국숭록대부영의정 의성양평군허준중건비가 세워져 있다.
 
   
▲ (사)의성허준기념사업회에서 2011년 5월 1일에 세운 의성 양평군 허준 중건비
 
해마다 한의사협회에서는 이곳 허준묘를 찾아와 참배를 하고 간다. 지금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허준에 대한 이야기가 방영되고 있다. 수많은 국민들은 의성 허준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다. 그리고 허준이 잠든 곳을 찾아보고 싶어한다. 파주시에서는 이 같은 상황을 잘 파악하여 이 곳을 동양의 의성 허준의 명소로 만들어 찾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린경제/한국문화신문 얼레빗=권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