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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정부를 원하면 세종 인재술 배우라

[실록으로 배우는 소통 7]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인사가 만사’라고 합니다만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철썩 같이 믿었던 사람이 어느 날 아수라백작처럼 얼굴을 바꾸거나, 국민 편에서 일한다기에 권력을 위임했더니 오히려 국민을 옥죄는 일을 목격할 때 우리는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 세종대왕의 동상

이러한 현상은 과거에도 적지 않았는데, 그래서 선조들은 인재쓰기를 정치의 요체로 삼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조 26년 1월 9일 어전회의의 의제도 인재 쓰기와 양성이었습니다. 당시 이조판서 원경하는 영조에게 인재는 미리 배양해야 위급한 일이 생길 때 대응할 수 있다고 고합니다. 그는 세종과 선조의 사례를 예로 들면서, 세종은 절의를 지킨 사육신을 배양했고, 선조 또한 이순신을 발탁한 것 외에 초년에 이미 이항복·이덕형·윤두수·윤근수·유성룡·이원익 같은 인재를 길러 얻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왕도 두 선대왕과 같이 인재를 미리 배양하기를 힘쓰라고 진언합니다.

 화려한 인재풀 자랑하는 선조시대가 세종조보다 못한 이유

그러자 영조가 불쑥 묻습니다. “선조 때는 인재가 매우 많고 성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금 사람들은 매양 영묘죠(英廟朝)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영묘조는 세종시대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에 대해 이조판서 원경하는 “세종시대는 우리나라의 제일 으뜸가는 문명(文明)의 기회”였다며, 시대에 응한 인재, 시대가 원한 사물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시대가 인재를 낳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이치에 맞지 않고 더욱이 영조의 물음에 대한 답변치고는 엉뚱하기까지 합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선조 때에는 시대가 원하는 인재가 없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조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선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조 2년 9월 25일 선조와 율곡 이이가 나누는 대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날 율곡은 사가독서제의 산물인 《동호문답》를 왕에게 바치면서 진강을 합니다. “예로부터 큰일을 성취한 군주가 지극한 정치를 흥기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현자를 대했습니다. 군신간의 수작이 마치 메아리 울리듯 하고,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습니다. 때문에 위아래가 서로 미쁘게 되어 정치가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요순 임금은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면서 찬성과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고, 우리나라의 세종과 세조 같은 왕은 군신간의 친함이 집사람[家人]이나 부자지간과 같았다고 덧붙입니다. 때문에 신하들은 왕의 은혜와 덕에 감격하여 죽을힘을 다해 나랏일을 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율곡의 요지는 정작 선조가 그렇게 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이 누차 입시(入侍)하여 매양 전하를 뵈니 신하들의 말에 조금도 응수하여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저 한 집안의 부자와 부부가 아무리 친하더라도 묻는 말에 답하지 않으면 정(情)이 막히는 법인데, 하물며 지위와 위치가 현격히 다른 군신의 관계이겠습니까.” 이이의 말인즉 왕이 입을 다물고 팔짱만 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말을 해야 할 때 침묵하고 대답해야 할 때 말을 안 하는 것은 일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라는 것이죠. 200년 종사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왕의 이러한 태도는 고치라고 질책합니다.

 그러나 선조는 이이의 진언을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학문은 온축하여 덕행이 된 뒤에야 밖으로 사업을 일으키는 법이다. 덕행이 없는 몸으로 어떻게 사업을 할 수 있겠는가. 또 삼대의 융성한 정치도 마땅히 점진적으로 시행해 나가는 것이지 갑자기 회복할 수는 없다.” 선조의 말이 딱히 틀렸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만, 이이는 왕의 이러한 태도가 성에 차지 않는 듯합니다. 덕행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정사는 하루도 폐할 수 없고, 진실한 덕이 늦되어도 정치를 방관하고 문란하게 놔둘 순 없는 일이라고 반박합니다.

 이어 “덕행과 사업은 동시에 서로 닦아 나가면서 같이 발전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리고 삼대의 치세를 갑자기 회복할 수는 없지만 작금의 폐단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은 행할 수 있다면서, 설령 요순과 같은 덕을 이룰 순 없다 하더라도 요순의 마음씀을 추구하고 좋은 정치를 본받으면 요순의 정치에 가깝게 될 것이라고 왕을 설득합니다.

 선조는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해 문제의식조차 갖지 않은 데 반해, 신하인 이이는 현실 개혁을 외칩니다. 또 왕은 서둘 일이 아니라며 미루는데 반해 이이는 절실하고 급하다고 강변합니다. 이처럼 왕과 신하의 대조적인 모습은 《선조실록》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즉, 선조는 이이의 말이 옳다고 여기면서도 자신은 의지와 실행능력이 없다며 매번 개혁안을 거부합니다.

 다시 이야기를 영조의 물음으로 돌아가 보면, 왜 이조판서의 답변이 이치에 맞지 않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선조시대의 인재 풀이 막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조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까닭은 실상 신하의 문제라기보다는 왕의 문제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즉 그 질문의 바른 대답은 왕과 신하의 불통에서 찾아야 합니다. 아무리 출중한 인재가 있더라도 이들의 말을 옳게 여겨 듣고 활용하는 왕의 안목과 지혜가 없다면 시너지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왕과 신하가 불합(不合)하고 불통(不通)하는 한 새로운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 창조하기는 어려운 노릇입니다.

 세종의 다사리 방식, 놀라운 성취로 이어져

세종시대의 인재풀은 화려한 선조시대와 같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15세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일굴 수 있었던 이유는 신뢰의 정치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일은 신하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터득한 왕이 세종입니다. 따라서 왕으로서 세종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들로 하여금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의제는 세종이 제시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를 묻고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해결책을 국정에 반영하는 소위 ‘다사리 의사결정방식’을 취했던 것입니다. 다사리란 두 가지의 뜻이 있는데, 하나는 모두 다 말하게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같은 민주적인 방식을 통해 다 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세종의 다사리 방식은 신하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회의에 참여하도록 하는데 기여했고, 그 결과는 놀라운 성취로 이어졌습니다.

 조선조를 통틀어 뛰어난 신하들, 참모들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다만 그 준재들의 재능을 어떻게 활용했느냐에 따라 태평성대를, 그 반대인 왜란․호란과 같은 환란을 불러온 것입니다. 이는 국가 운영뿐 아니라 크고 작은 기업과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때보다 인재쓰기에 대한 지도자의 안목과 철학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 김기섭(세종연구가/한국형리더십교육센터 대표)

세종대왕의 능(영릉)이 있는 여주에서 태어나, 경희대 대학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세종의 의사결정 연구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오래 전부터 일선 학교와 교육청에서 교육토론과 고전읽기지도법을 강의하고,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며 한국적 회의와 소통문화, 한국형 토론과 리더십을 개발하고 보급하는데 온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