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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김세종제 <춘향가>를 이어온 김수연 명창의 이야기

[국악속풀이 114 ]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김세종제의 <춘향가>는 김찬업을 통해 정재근으로 이어지고 정응민에게 전해져서는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 이 시대 최고의 명창으로 이어지는 전승계보를 자랑한다. 특히 판소리 <심청가>는 조상현과 성창순이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일찌감치 인정을 받았으나 김세종제 <춘향가>의 경우에는 다소 뒤늦게 성우향이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아 전승을 담당하고 있다. 성우향의 후계자들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명창으로 김수연, 안애란, 염금향 등이 있고 그리고 정회석과 염경애, 박복희, 강경아 등이 그 뒤를 이어 전승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이번 주 국악속풀이에서는 김수연 명창만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김수연(1947~) 전북 군산생이다. 군산은 호남평야의 기름진 쌀을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하여 일제강점기 개발된 항구도시로 알려져 있다. 소녀 시절 김수연의 집 근처에는 국악원이 있었는데,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대금이며 아쟁의 소리도 들려오고, 판소리나 민요창도 흘러나와 김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그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넋을 잃고 그 소리를 들었단다.

   
▲ 혼신을 다해 판소리 ,춘향가>를 부르는 김수연 명창

한번 듣게 되면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는 총명한 어린 시절이었으니 멈춰 서서 몇 번 듣고 따라 부르고 또 따라 부르면서 자연스레 소리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국악이 전염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한번 소리가 좋아지면 배우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 소리요 악기인 것이다. 그래서 김재경·최광열·강도근 같은 당대의 소리꾼들을 찾아가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떠드는 어린 시절의 음악환경이 중요하고, 음악적 경험이나 실습교육이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환경을 무시하고 집 근처에 술집을 비롯한 비교육적 업소나 시설들을 허가한다면 이미 어린이들의 교육환경은 파괴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말 것이다. 몇 년 전부터인가 우리 정부는 대학을 졸업한 국악 전문 인력들을 강사로 선발하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교육현장에 파견시켜 국악교육을 담당케 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것 역시 어린이들의 교육환경과 깊은 관계가 있는 정책이라 하겠다.

판소리를 배우면서 소리속을 조금 알게 되니까 소리에 대한 갈증은 더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그래서 김수연은 중대 결심을 하고 1960년대 후반, 서울로 올라와 당대 최고의 명창이었던 박초월을 찾아 그 문하에서 소리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박초월 명창은  국악예술학교를 세우고, 젊은 인재들을 키우는가 하면 작고한 국악예술인들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지내주기도 한 명창이었는데, 그는 수리성이면서도 애원성이 그득하여 시대적 분위기와 함께 절정의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당시 박초월 명창의 문하에는 많은 소리꾼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초월 명창은 유성준의 동편제 <수궁가>를 전승하였는데, 유성준과는 달리 박초월은  특유의 애원성을 가미하였다. 김수연이 박초월 문하에서 공부하던 초창기에는 이름난 선배들의 그늘에 가려 존재감이 적었으나 소리공부에만 전념하여 <수궁가>를 이수하고, 다시 <흥보가>를 마칠 무렵에는 그의 이름이 서서히 세간에 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누구보다 박초월 명창의 소리 전통을 잘 계승한 제자로 평가받고 있다.

김수연은 1978년 남원춘향제 판소리 장원을 시작으로 각종 판소리 경창대회를 평정하다가 1989년에는 전주대사습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되며 국립극장이나 국립국악원 등지에서 완창무대를 수시로 열어온 명창이다.

박초월의 작고한 뒤, 그는 성우향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하게 되면서 새로운 음악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성우향에게는 우리가 보성소리라고 부르고 있는 김세종제 <춘향가>와 강산제 <심청가>를 배웠다. 이 두 소리는 다른 소리와는 달리 우아하고 기품이 있으며, 감정을 과장하지 않는 특징이 있어서 지금까지 김수연 명창이 학습해온 판소리 스타일과는 대조를 이루는 소리이나 그럼에도 그는 이 두 거대한 소리제를 적절하게 흡수하여 자신의 스타일로 다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소리뿐이 아니다. 김수연은 소리 못지않게 인품을 갖춘 소리꾼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학 강단에서도 그의 인기는 대단하다. 학생들을 지도할 때에는 엄한 스승이나 평소에는 친구 같은 선생이라고 수제자 강경아는 귀띔해 준다. 남을 위해 봉사하거나 배려함에도 김수연의 이름은 자주 거명이 될 정도로 모범생 소리꾼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수연의 소리뿐 아니라 인품은 제자들에게 그대로 전수가 되리라 믿는다. 이제 본격적인 김수연의 명창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분위기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판소리는 그 전승력을 상당부분 상실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판소리가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는 배경에는 무형문화재라는 제도에 의해 보호받은 측면도 있지만 판소리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끈질긴 생명력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과 70년대 이후 대학에 한국음악학과가 신설되어 전문가의 양성과 교양인의 양성, 그리고 판소리에 관한 일반의 인식이 어느 정도 긍정적인 것으로 확산되었던 점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