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지난 2010년 8월 15일은 광복 65주년이었고 같은 해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답사단을 꾸려 조선인들의 강제노동 현장인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시작으로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에 이어 도쿄의 야스쿠니 반대 행사가 있던 히비야공원까지 장장 1,200킬로 거리를 12일에 걸쳐 돌아보았다. 이 글은 그때의 기록이지만 현재의 상황이기도 하다. 곧 다가올 68주년 광복을 앞두고 조선인강제연행 궤적을 쫓아갔던 기록을 8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설명-
“나는 학살 현장인 사할린의 설원에 서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뿌리 깊은 원죄를 뼈저리게 느낀다. 일본이 양심이 있다면 강제연행한 조선인을 맨 먼저 귀국시켜야 했다. 그런데 일본인만 후송하고 조선인은 내버려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가 용서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일본인 하야시에이다이 씨의 격앙된 ‘일본사죄론’이다. 이 말은 비단 사할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며 2013년 현재 남아있는 60만 재일조선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말이다.
약속시간보다 15분이나 늦게 나타난 답사단 일행을 반긴 것은 기타큐슈 고쿠라(小倉)교회 의 주문홍 목사였다. 기타큐슈 생애학습종합센터 31호실에는 주 목사와 답사 이틀째 안내를 맡아 줄 배동록 할아버지 등이 마침 이 지역의 야간 마츠리 행렬에 걸려 일행이 탄 버스가 늦어지고 있음에도 많은 자료를 준비한 채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었다.
생애학습종합센터에는 지역주민을 위한 음악, 미술, 외국어 공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여 평생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60여 명 정도 들어갈 만한 제법 큰 강연실에서 답사단을 기다리던 주 목사는 우리가 도착하자 공손한 인사와 함께 칠판에 큼지막하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썼다.
▲ 재일조선인의 실상에 대해 열강을 하는 주문홍 목사 |
주 목사는 28년간 일본 땅에 살면서 재일조선인의 권익에 힘쓰는 한편 기타큐슈 한글 웅변대회 실행위원회를 이끄는 등 우리말 운동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날 강연 후 주 목사를 만난 것은 이틀 후인 8월 9일 나가사키에서였는데 조선인 원폭희생자추모집회에 참석하려고 승합차에 교포들을 가득 태워 고쿠라(小倉)에서 3시간 넘게 달려 추모모임에 참석할 만큼 재일동포사회의 크고 작은 일에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이 가슴을 뭉클케 했다.
28년간 일본 땅에 살면서 재일조선인의 권익에 힘쓰는 주문홍 목사
이날 강연 제목인 ‘조선인 강제 연행의 역사와 재일조선인의 현황’이란 제목에서처럼 답사 기간 내내 우리는 가는 곳마다 <재일조선인>이란 말을 들었다. 생각해보면 <재미조선인>이라거나 <재프랑스조선인> 같은 말은 없는데 유독 <재일조선인>만 있다. 그것은 <재일한국인>이란 말과 차별화된 것으로 시대적으로는 ‘일제강점기’임을 암묵적으로 말해준다. 일제강점기에 왜, 무엇을 하려고 조선인은 일본 땅에서 거주하게 된 것일까? 주 목사는 나눠준 자료에서 <재일조선인> 역사를 1875년 강화도사건(운양호)사건으로부터 짚어갔다.
▲ 주문홍 목사의 강연을 열심히 듣는 답사단 |
강화도사건이란 익히 알다시피 1875년(고종 12) 9월 20일 일본 군함 운양호가 조선의 강화해협에 불법 침입하여 포격을 가하고 살육·방화·약탈을 자행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일본의 정세는 1873년 무렵부터 조선 문제를 둘러싼 이른바 정한론(征韓論)이 크게 일어나고 있던 때였다. 이것은 '탈아외교'(脫亞外交)를 주장하던 세력이 서구열강에 먹혀들지 않자 일본 안에 팽배해있던 유신과 개혁에 대한 불평·불만을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정복의 흉계로 삼는 계기를 말한다.
일본의 신식무기를 앞세운 예측 못한 도발로 조선은 무기력을 드러냈고 일본에서는 다시 정한론자들의 입김이 거세 강화도사건에 대한 조선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의 개항 등의 조건을 들이댔다. 그뿐만 아니라 강화도사건 이후 바로 일본정부는 6척의 군함과 800명의 군대에 호위 된 전권(全權) 대표단을 파견하여 1876년 2월 27일 강화도에서 조선과 전문 12조로 된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일본의 강압적 위협 하에서 맺어진 불평등조약이었다. 결국, 강화도사건은 일본의 한반도침략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은 불평등조약 체결을 계기로 조선식민지화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한민족 비극의 출발이었다.
일제의 토지조사와 수탈로 조선인들 유랑의 길로
이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흉계는 1910년 8월 29일 조선강제병합으로 이어졌고 이듬해 착수한 대대적인 토지조사로 인해 조선인은 땅을 빼앗긴 채 긴 유랑의 길을 걷게 된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조선인의 일본행이었다. <재일조선인>의 인구 추이를 살펴보면 1910년에는 2,600명이던 것이 1920년에는 40,775명 1930년에는 419,009명으로 늘었으며 1945년에는 자그마치 230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일본 땅으로 건너가게 된다.
주 목사의 자료에는 이들 230만 명을 모두 ‘강제연행자’라고 표시하고 있다. 토지를 빼앗고 인적자원을 수탈하는 게 식민지 경영자들의 중요 목표일진대 ‘강제연행’을 가리켜 일본인 학자들의 ‘도항자(渡航者)’라는 표현은 적절치 못한 것이라고 본다. 도항은 단순히 “바다를 건너간 자”란 뜻으로 강제성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용어 하나라도 바르게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일본인의 조선 내 토지소유면적이 조선인 보다 많아져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땅은 얼마나 빼앗긴 것일까? 1920년대 토지소유 변화를 보면 1920년대 일본인의 토지는 3,674정보(조선인 4,181정보)이던 것이 1930년대로 오면 일본인이 8,999정보(조선인 3,545정보)로 한반도 토지의 3분의 2를 일본인이 가로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악랄한 일이다.
오늘날 일본에 거주하는 60여만 명의 <재일조선인>의 뿌리는 국권 강제침탈과 토지착취, 강제연행이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이후 <재일조선인>문제가 풀릴 것이다. <재일조선인>들은 오늘날 미국으로 이민 가듯이 그렇게 건너간 사람들이 아님을 일본정부는 똑똑히 인식해야만 한다.
강연시간 ‘2시간’ 동안 주 목사가 들려주고자 한 <재일조선인>이야기는 애초부터 어려운 주제였다. 조선인 거주의 역사를 1910년으로만 잡아도 벌써 100년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 목사는 휴식 시간 없이 꼼꼼하게 <재일조선인>의 현주소를 들려주었다.
그중 한 가지가 ‘외국인 등록법’이다. 일제는 1945년 12월 25일 재일조선인과 대만인의 참정권을 박탈하였다. 일본에 거주하되 사람다운 행사나 권리를 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다만, 세금은 꼬박꼬박 물게 했다.
그뿐 아니라 2008년 11월에는 외국인 입국자 16세 이상 ‘지문채취제도’를 법제화하여 이에 불응하는 사람의 입국을 엄격히 막고 있다. 지문만 찍는 게 아니다. 범인 다루듯 사진기로 우리의 얼굴도 찍어 두고 있다.
또한, 문제가 되는 것이 ‘재류허가문제’이다. 1952년 거주권을 인정한다면서도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때 <국적란>에 ‘한국기재’를 강요하여 ‘재일조선인’과 ‘재일한국인’ 사회를 분열시켰다. 생각해보면 ‘재일조선인’들은 조국이 일제 수하에 있을 때 건너간 사람들로 6·25 한국전쟁 이후 갈라진 남한과 북한이라는 체재 이전의 동포들이다.
이념과 사상을 갖지 않은 순수한 ‘조선인’들은 조국의 분단만으로도 가슴 아픈 판에 ‘남’ 또는 ‘북’을 선택하도록 강요당했으니 어느 쪽을 선택하던 그 피해는 고스란히 재일조선인 몫이었다. 1991년 5월 새로운 재류권이 만들어졌다고는 하나 조선인의 강제퇴거제도를 남겨두어 언제든지 ‘일본을 떠나라.’라고 할 근거를 남겨두는 치밀함을 보이는 게 현재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현주소이다.
강제노역에 대한 정당한 보상, 피폭자 치료와 보상 등 일본인과 차별 적용
더 가관인 것은 ‘국적’에 의한 제도적 차별에 있다고 주 목사는 힘주어 말했다. 1961년 이른바 국민연금제도를 만들어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 적용하였으며 1986년 국적조항이 철폐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차별은 남아 있다고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참정권이다. 이를 두고 주 목사는 ‘의무는 부과하되 권리를 안 주는 악법’이라고 단언했다. 인간의 권리를 주지 않겠다는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강제노역에 대한 정당한 보상, 피폭자 치료와 보상, 민족학교에 대한 차별 등이 존재하는 한 일본은 ‘인권의 사각지대’임이 틀림없다.
민족교육이 이뤄지는 조선인학교만 해도 그렇다. 학교건물과 교사월급을 모두 학부모 돈으로 충당해야 할뿐더러 정식 학교로도 인정하지 않는 현행 일본의 태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사태를 정확히 보는 사람들의 말이다. 낡은 건물에서 학생 수마저 감소하는 조선인학교에 비해 으리으리한 현대식 건물을 지어놓고 있는 일본인 학교를 보면 일본정부가 얼마나 조선인을 차별하고 있는지 극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시모노세키 일명 똥굴동네(神田)의 초라한 조선학교, 학부모 돈으로 교실을 짓고 공부를 가르친다.(왼쪽) / 일본인 어린이들이 공부하는 하카다소학교, 정부지원으로 번듯한 교실에서 공부한다. |
주 목사는 일본에서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 한국인들이 일본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불평등과 차별로 말미암은 고통을 누구보다도 피부로 느끼며 봐 왔을 터였다. 그래서인지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야기 끝에 잊을 수 없는 일본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야시 에이다이(77살) 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조선인의 일제 징용관계 글을 많이 쓴 하야시 씨는 후쿠오카 타가와(田川)사람으로 답사기 <1편>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으며 큐슈일대를 안내한 요코가와 씨의 동향 선배이다.
▲ 하야시 에이다이 작가의 조선인 강제연행 관련된 책들 50여 권 중 일부 |
그의 아버지는 탄광에서 탈출하던 조선인을 이주시켰다는 죄목으로 잡혀가 심한 고문 끝에 죽게 되는데 하야시 씨는 이때 11살의 소년이었다. 이후 와세다대학을 중퇴하고 조선인 징용과 관계가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집요하게 취재하여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계속해왔다. 반민족문제연구소가 1992년 펴낸 《사할린은 통곡한다, 계명출판사》도 하야시 씨의 ≪증언, 사할린조선인학살사건≫이란 원제목의 번역본인데 여기서 하야시 씨가 한 말이 귓전에 아직도 생생하다.
학살로 얼룩진 일본인의 죄악상을 고발한 하야시 에이다이 작가
“나는 학살 현장인 사할린의 설원에 서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뿌리 깊은 원죄를 뼈저리게 느낀다. 1923년 9월 1일 관동 지방을 강타한 미증유의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약 6천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군대와 민간인에 의해 학살당한 사실이 떠오른다. 사할린 사건은 제2의 관동대지진 사건이다. 패전기 혼란 상태라는 상황보다도 일본군과 일본인이 조선인에 갖고 있던 차별의식과 편견이 대량학살을 낳은 것이다. 전쟁의 엄청난 비극은 병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일반 민중을 할퀴고 지나간다.
일본이 양심이 있다면 강제연행한 조선인을 맨 먼저 귀국시켜야 했다. 그런데 일본인만 후송하고 조선인은 내버려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가 용서될 수 있을 것인가? 일본정부는 남겨진 조선인의 비통한 울부짖음을 외면한 채 그들의 귀국 대책에 눈감았다. 인간으로서 양심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즉각 사죄해야 할 것이다.” 하야시 씨의 격앙된 ‘일본사죄론’은 1973년에 나온 말이지만 비단 사할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며 2010년 현재 남아있는 60만 재일조선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말이다.
비록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재일조선인의 현황을 주 목사는 소상히 들려주었다. 재일조선인 이야기는 한일평화역사기행 내내 우리의 관심과 화제였는데 때로는 강연으로 때로는 증언으로 가는 곳마다 재일동포들이 나와 일제강점기 만행 사실을 들려주었다.
이날 주 목사의 강연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항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하나는 한일강제병합 이후 계속되고 있는 일본정부의 비인도적인 조선인 처우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정부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것이었다.
때마침 올해는 국치10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 한일 양국의 양심 있는 시민들이 나서서 ‘한일과거사 청산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공동 학술대회 등 뜻깊은 행사가 마련되었다. 이에 우리 답사단도 ‘경술국치100년을 맞이하여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의 하나로 일본 땅을 찾아 나섰던 것 인만큼 귀국해서도 ‘행동하는 사람’으로 남기를 자처하여 8월 26일~29일 까지 성균관대학에서 열린 학술세미나와 국치일인 29일 남산 통감관저 터에 세운 국치일 표석 세우기 행사에도 참석하는 등 한일간의 평화를 모색하는 일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보였다.
고쿠라(小倉) 기타큐슈생애학습센터에서 가진 주문홍 목사의 <재일조선인의 실상>에 대한 강연은 <오빠생각>을 다 함께 부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강연이 끝나고 나오니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고쿠라 거리는 마침 열린 여름마츠리로 왁자지껄했다. ‘마츠리(축제)의 나라’ 일본에서 뜻밖에 만난 ‘여름 마츠리’ 행렬 속으로 젊은 답사 단원들은 빨려들어 가듯 합세해 버렸고 연로하신 분들만 일찌감치 다문화공생센터에 여장을 풀었다. 다음 날 일정이 빠듯했지만 젊은이들은 광란(?)의 밤을 보냈다는 후문이다. 역시 젊음은 어디서나 빛을 발하는 존재로 그 자체가 발광(發光)을 지닌 생물 같다. 젊은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기(氣)와 끼는 이후 우리 답사단에 활력과 정력의 원천 그 자체였다. 그렇게 고쿠라의 밤은 깊어갔다.
▲ 뜻밖에 만난 고쿠라의 여름 축제(마츠리)를 보며 빠듯한 답사길의 피로를 풀었다 |
<제3편:나가사키 조선인희생자기념탑과 ‘가해역사 기록의 현장’ 오카마사하루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