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지난 2010년 8월 15일은 광복 65주년이었고 같은 해 8월 29일은 경술국치 100년을 맞았었다. 그래서 우리는 “경술국치 100년,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기행” 답사단을 꾸려 조선인들의 강제노동 현장인 기타큐슈의 치쿠호 탄광을 시작으로 시모노세키, 오사카, 교토에 이어 도쿄의 야스쿠니 반대 행사가 있던 히비야공원까지 장장 1,200킬로 거리를 12일에 걸쳐 돌아보았다. 이 글은 그때의 기록이지만 현재의 상황이기도 하다. 올해 68주년 광복을 맞아조선인강제연행 궤적을 쫓아갔던 기록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설명-
“나는 학살 현장인 사할린의 설원에 서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뿌리 깊은 원죄를 뼈저리게 느낀다. 일본이 양심이 있다면 강제연행한 조선인을 맨 먼저 귀국시켜야 했다. 그런데 일본인만 후송하고 조선인은 내버려둔 것이다.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가 용서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일본인 하야시에이다이 씨의 격앙된 ‘일본사죄론’이다. 이 말은 비단 사할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며 2013년 현재 남아있는 60만 재일조선인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말이다.
답사 마지막 코스인 도쿄 야스쿠니신사(이하 야스쿠니)로 가는 날은 발걸음이 무거웠다. 8월 14일 아침 이날은 야스쿠니만 가는 날이라 전세버스를 예약하지 않은 관계로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한 뒤 커다란 짐가방을 끌고 지하철을 타야 했다. 섭씨 37도를 오르내리는 도쿄의 찜통더위는 가히 살인적인 더위였지만 더 걱정스러운 것은 답사단이 과연 야스쿠니 방문이 제대로 이뤄질까 하는 점이었다.
야스쿠니는 도쿄 한복판 치요다쿠(千代田区)에 있는 이른바 ‘전쟁에서 싸우다 죽은 호국 영령을 모신 신사(神社)’이다. 이곳은 아무나 수시로 드나들 수 있는 시설이므로 특별히 출입 통제 여부를 놓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답사단은 이곳 방문을 걱정해야 했다.
야스쿠니 방문 저지의 징조는 교토에서 장거리 야간 버스를 타고 도쿄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감지되었다. 일본의 극성스런 우익들이 ‘한일평화를 여는 역사 기행단’의 야스쿠니 방문을 원천 봉쇄한다는 소식이 긴급히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이번 답사여행의 총 인솔 책임자인 서우영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은 도쿄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도쿄 소식’을 수시로 전했다.
‘도쿄에서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야스쿠니 방문 시에 우익의 불미스런 행동이 있을 수 있으므로 방문 자제를 요청한다는 일본 시민단체의 연락이 왔다.’라면서 시시각각으로 도쿄에 있는 재일동포들과 일본시민단체들의 상황을 전했다. 답사단은 버스 안에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야 했다.
▲ 구단시타역에서 경찰은 우익으로부터 보호한다며 답사단의 야스쿠니행을 저지했다. (왼쪽), 지하철 안에서도 답사단은 경찰의 포위 속에 꼼짝을 못했다.
그 시나리오란 여성들과 나이 드신 분들이 빠지고 남자들만 방문하거나 또는 불미스런 충돌을 각오하고라도 전원이 방문하는 안건 두 가지였다. 물론 답사단은 후자를 택했다. 특히 원한의 야스쿠니에 아버지를 강제합사 당한 박남순(68살) 씨는 기필코 하늘이 두 쪽 나도 가야 한다고 했다. 아무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박남순 씨 아버지는 전북 남원 출신으로 일본 구(舊) 해군 군속신상조사표에 따르면 1945년 4월 11일 ‘전사처리’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1959년(소화34년) 7월 31일자로 야스쿠니에 합사되었다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유가족에게 야스쿠니에 합사(合祀)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일본 정부가 무단으로 합사해놓은 아버지 박만수 씨는 그러나 일제자료에는 니이야마만수(新山滿秀)로 창씨 개명되어 있었다.
▲ 지하철 구단시타역에서 야스쿠니행을 저지당해 항의하는 모습(가운데 남자가 경시청 사복형사) 앞에 통역에 가려 왼쪽에 모자만 보이는 이가 답사단 책임자 서우영 기획실장 |
그런 아버지를 만나러 야스쿠니로 향했지만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주최 측에서 시시각각 전해오는 도쿄 분위기를 100% 받아들인다면 혹시 모를 극성스런 우익들의 횡포도 안심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흉기라도 휘둘러 답사단 중 누구라도 다치는 날이면 그 뒷수습을 감당키 어려운 문제도 있어 답사단은 도쿄로 올라오는 5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합의를 보지 못한 채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서 하루 머무는 동안 이 문제를 계속 의논한 결과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라는 마음으로 답사단 전원이 야스쿠니로 가기로 합의하여 지하철에 몸을 실은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우스운 노릇이었다. 일반시민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야스쿠니를 ‘일본 우익들이 해코지가 있을지 모른다.’라면서 지하철 입구에서부터 저지를 당했으니 말이다. 야스쿠니 정문으로 나있는 지하철 구단시타(九段下) 역에 내려 지상으로 올라가 보지도 못한 채 지하 계단에서 우리는 경시청 소속 경찰들에게 포위된 채 실랑이를 해야 했다.
▲ 답사단원 박남순 아버지 박만수 씨의 군속신상자료와 야스쿠니합사 도장이 찍힌 통보문
‘비켜라! 왜 우리의 길을 막느냐! ’고 호통도 쳐보았지만 사복 경찰을 비롯한 많은 경찰은 ‘신변안전’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우리를 지하철 계단에 나란히 앉히고는 협상을 요청했다. 군국주의 일본강점기 때도 아닌데 도쿄 한복판에서 일어난 경시청 사람들의 야스쿠니 방문 훼방은 해프닝을 넘어 이건 숫제 코미디였다. 우리는 옴짝달싹 못한 채 ‘사고 나면 위험하다.’ ‘책임 안 진다.’ 같은 협박을 받으며 길을 막고 있는 사복형사와 협상에 나서야만 했다.
야스쿠니신사 코 앞에서 방문 저지당해
그러나 지하철 계단에서 벌어진 경시청의 쇼를 주목하는 일본시민들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쪽에서는 야스쿠니반대행동한국위원회 상임대표인 이해학 목사와 서우영 기획실장이 경시청 사람들과 지하철 계단 위에서 즉흥 협상에 들어갔다. 물론 나머지 답사단은 얌전하게 지하계단에 앉아 있기를 종용받았다
간간이 서 실장이 우리에게 다가와 협상안을 소개했다. ‘몇 사람만을 내보내겠다.’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분노했다. 우리는 전원방문을 요구했으나 협상은 결렬되었다. 한두 명만 나가서 우익들의 상황을 확인하라는 더러운 제안에 우리는 침을 뱉고 돌아섰다.
야스쿠니 방문을 훼방 놓는 자들은 우익이 아니라 경시청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우익을 핑계 대고 우익보다 더 횡포를 부렸다. 그들은 국가권력이었다. 야스쿠니를 만든 명치정부를 계승한 국가권력은 2010년 8월에도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서 날뛰었다. 까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형(?)될 분위기를 뚫고 글쓴이는 지상으로 몰래 빠져나와 야스쿠니로 달려갔다.
▲ 무단 합사된 조선인 징용자 원혼들이 ‘웬수와 함께 잠들고 싶지 않다.’라고 외치고 있는 도쿄 야스쿠니신사 본당, 저기에 박남순 씨의 아버지 박만수 씨의 위패도 있다
한 정거장 거리를 택시로 달려 야스쿠니 정문의 녹슨 구리색 도리이(鳥居, 신사로 들어가는 크고 높은 문)로 향하는 약간 비탈진 정문 입구에는 경찰이 말하던 ‘염려스런 우익’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한쪽에 얌전히 세워둔, 요란스레 깃발을 단 차량 서너 대에 우익처럼 보이는 몇 사람만이 서성일 뿐이었다. 지하도에서 사복형사들이 ‘야스쿠니에는 우익들이 득시글하다.’라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우리는 기만당한 것이었다. 공식적인 일본의 국가권력인 경찰에 말이다.
지하철 표를 손에 쥔 채 지상으로 올라오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린 답사단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어둠 속을 달리고 있을 터였다. 2살 때 강제징용으로 아버지를 여읜 박남순 씨는 답사 기간 내내 글쓴이에게 야스쿠니를 꼭 데려가 달라고 신신당부했었는데 일이 틀어져 너무 송구스러웠다. 박남순 씨만이라도 함께 야스쿠니로 갔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앞섰지만 좀 전의 지하철 분위기에서는 불가능했다.
경찰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두 되돌아가는 지하철을 타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찰거머리처럼 답사단을 에워싸고 전원이 지하철을 타도록 했다. 물론 그들도 동승했다. 그런 살벌한 감시 하에 글쓴이만 몸을 빼는 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경찰을 따돌리고 잠행(?)한 야스쿠니 신사는 여느 때와 다른 징조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온했다. 특별히 답사단이 야스쿠니에 가서 행패를 부릴 것도 아닌데 제지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답사단은 제지를 당했고 끝내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상한 경찰들이었다. 답사단을 대신해서 야스쿠니를 생생히 기록할 필요를 느껴 구석구석 돌아보다가 전쟁기념관인 유취관(遊就館)에 들어가 보았다. 마침 그곳에는 가미카제(神風) 특별 그림전이 열리고 있었다. (2010년 3월 20일~12월 8일) 800엔씩 내고 들어가는 전쟁미화기념관에는 전시장 입구부터 B29 등 무기들을 잔뜩 진열하여 전쟁냄새가 물씬 풍겼다.
어린아이 손을 잡고 온 시민들은 ‘전쟁은 아름다운 것이고, 전쟁은 일본을 지탱하는 힘’임을 과시하는 ‘유취관’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야스쿠니 측의 ‘전쟁미화’ 작업은 종전 후 6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했다. 아니 더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었다.
▲ 총을 쥔 병사, 태평양전쟁에 쓰인 군용기, 살상무기 대포, 전쟁을 찬양하는 책들로 가득한 유취관 서점 모습 (왼쪽부터 시계방향)
뜻하지 않은 야스쿠니 저지에 맥이 빠져 지하철을 타고 되돌아가고 있을 답사단을 대신해서 부지런히 8월 14일 정오 무렵의 야스쿠니 잠행 스케치는 계속 되었다. 점심이 다가오자 근처 사무실의 샐러리맨들이 공원 산책하듯 야스쿠니 신사 참배 모습이 보였다. 제법 사람들이 모인 중앙의 본당에는 두 손을 모으고 참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조용하던 경내가 갑자기 소란스러워 보니 수십 명의 기자가 말쑥한 양복차림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취재 경쟁이 일었다. 알고 보니 프랑스의 ‘국민전선’을 비롯한 유럽의 우익정당 대표단이 종전기념일을 맞춰 야스쿠니를 참배하러 온 것이었다.
이들의 방문이 있기 이틀 전인 8월12일자 야후제팬 기사에는 중국의 신화사(新華社)통신 보도를 인용하여 “국민전선의 루팡 당수를 비롯하여 영국, 호주, 헝가리, 벨기에 등의 우익 정치인이 대거 야스쿠니를 참배한다. 외국정당 당수들이 종전기념일에 맞춰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것은 근래 보기 드문 일”이라고 보도했다. 또 “이들 우익정당의 당수들은 야스쿠니를 가리켜 파리의 개선문 광장에 있는 무명용사의 탑 정도로 여기고 있으며 전쟁에 죽어간 불행한 용사에 경의를 표한다.”라고 전했다.
이들은 중국기자의 “A급 전범(戰犯)과 야스쿠니 문제”를 묻는 말에 “전범이란 일본이 졌기 때문에 붙여진 말로 아무 문제없다는 뜻의 헤젠(平然)이라는 말”로 대꾸했다. 헤젠이란 우리말로 ‘일없다, 문제없다’라는 뜻이다. 이번 프랑스를 비롯한 우익들의 대거 일본 방문은 프랑스 ‘국민전선’의 2인자인 고르닛슈 전국대표가 주선한 것으로 그의 부인은 일본인이라고 전한다.
▲ 프랑스 우익 정치인의 야스쿠니 출현에 일본 언론들은 신이 났다
아마도 남편을 시켜 야스쿠니를 참배함으로써 일본의 우익에 일조를 해달라는 특별 주문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런 인물들을 일본 언론은 호들갑을 떨며 보도했고 이를 본 일본인들이 과거 일본 군국주의와 야스쿠니를 ‘아무 문제 없는 곳’으로 믿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스 우익들이야 일본 우익 편을 들어주려고 야스쿠니를 찾아오지만 일본인들은 누굴 참배하려고 온 것일까? 전쟁에서 죽은 이름 없는 병사를? 전쟁에서 죽은 에이급 영웅들을? 그러나 구태여 그러한 개인의 명복은 빌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이미 ‘위대한 신이 되고, 영웅’이 되어 국가가 제사를 지내주고 있지 않은가?
불쌍하고 외로운 영혼이라면 오히려 남의 나라 전쟁에 동원되어 총알받이가 된 조선인이요, 중국인이다. 그들은 일본의 전쟁놀음에 가장 큰 희생자요 피해자였다. 죽어서도 귀향을 못한 채 원수 일본군국주의 정신을 옹호하는 야스쿠니의 제삿밥을 먹어야 하는 딱한 신세인 것이다.
‘야스쿠니’란 어떠한 곳인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야스쿠니는 ‘야스쿠니진쟈’의 준말이다. ‘야스쿠니진쟈’란 한자로는 ‘靖國神社’라고 쓰는데 한자대로 풀어보면 ‘넋이 편안한 나라’ 또는 ‘넋을 편안하게 모시는 사당’이란 뜻이다.
▲ 상명대학교 고경일 교수와 학생들이 그린 야스쿠니 풍자만화 작품들
그러나 야스쿠니 측 풀이는 ‘조국을 평안하게 한다, 평화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라는 뜻이라면서 “이곳에는 1869년 이래 명치유신,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지나사변, 대동아전쟁 등 나라의 위태로움을 맞아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246만 6천여 명의 영혼을 신분과 남녀 구별 없이 야스쿠니의 대신(大神)으로 모시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언뜻 보면 ‘평화로운 국가 건설’이라든가 ‘편안한 넋을 모시는 곳’이란 말이 매우 양심적이고 이상적인 말처럼 들린다. 이러한 곳에 <문제>가 있다고 여길 일본인들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야스쿠니는 오늘날 <문제 덩어리>이자 <골칫덩어리>이다. 왜일까?
당시 징용으로 나가 싸우다 죽은 조선인은 2만 1,000여 명, 대만인 2만 8,000여 명으로 이들은 자발적이 아닌 강제징용이었다. 전쟁이 끝났으면 당연히 고국으로 돌려보내야 옳다. 넋이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강제 무단 합사(合祀)해 놓았다. 이것이 문제의 시발이다.
이에 한국과 대만 유가족들이 무단 합사에 강력히 반발하며 <합사 취하>를 요청하자 ‘우리가 극진히 잘 모시고 있는데 왜 불만이냐? 그들은 당시 일본인으로 전사했기 때문에 사후에도 일본인이다. 신도(神道)의 신앙 상 한번 모신 신은 영원한 신’이라는 억지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야스쿠니는 순수한 국내문제이기 때문에 외국이 참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제2차 대전으로 전사하고 야스쿠니에 모셔졌던 것을 일본국민이 현재의 중동 지하드(聖戰, 성전)와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차대전과 야스쿠니신사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다.”라고 사토코조 뉴욕대 교수(2005.6.6 아키타 사키가케신문)는 말했다.
그는 걸핏하면 내정간섭이라는 일본 측에 일침을 가했던 것이다. 이처럼 야스쿠니 문제에 대해 내정간섭 운운하는 것은 가해국으로서 할 말이 아니다.
“야스쿠니문제는 종전의 정교분리라는 논점보다도 동아시아의 전쟁, 침략, 식민지지배 피해자의 인격권침해문제, 종교, 사상의 자유, 평화에 대한 위협이라는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라고 일본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교수이자 코리아연구센터소장인 서승 교수는 <변혁의 어소시에 2010, 7월호 ‘한국병합 100년, 지금 일본에게 묻는다.’>라는 특별기고문에서 지적했다.
그는 또 “일본은 세계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비정상적인 나라다. 이른바 문명국을 자처하는 나라가 일찍이 저지른 국가범죄와 국가지휘로 일어난 잘못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그 유례가 없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 가미카제(神風) 특별 그림전 홍보전단(왼쪽), 야스쿠니 경내에는 전쟁에 동원되었던 말(軍馬)과 개(軍犬), 심지어는 비둘기까지 동상으로 만들어 떠받들고 있었다.
그런 비판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야스쿠니측에서는 전쟁터에서 숨져간 사람은 모두 <일본인으로 전사>했으므로 그들을 모두 <大神>으로 받들어 모신다면서도 실제로는 조선병사와 일본병사를 차별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망한 일본병사는 유족들을 위로하고 보상과 충분한 유족 연금을 보장하면서 조선인 병사 유가족에게는 보상과 연금을 주지 않고 있다. 그들의 이중성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일본에는 이른바 온큐호(恩給法, 1924년 법률 제48호)라는 것이 있어서 공무원이나 군인 군속 등에 대한 예우가 있다. 그러나 이 <온큐호>에서는 태평양전쟁에서의 군인 군속 등은 재직 기간이 짧아서 (장교는 13년 이상, 하사관·사병 12년 이상) <온큐>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예외 조항을 두었다. 이에 일본 병사 유가족이 반발하여 만든 것이 이름도 긴 독립행정법인평화기념사업특별기금(独立行政法人平和祈念事業特別基金, 1988년 7월 1일)이다.
그들은 이것으로 태평양전쟁 말기 동원된 징용자들의 치료와 유족들을 위한 원호활동을 하고 있지만 한국인은 제외다. 아버지의 영혼이 야스쿠니에 무단으로 잡혀 있는 박남순 씨는 글쓴이가 일본의 보상에 대해 확인해봤지만 1엔도 받은 바 없다고 했다. 보상은커녕 사비(私費)를 들여 평생을 벼르고 별러 야스쿠니에 왔는데, 문 앞에도 못 가보게 저지를 당했으니 칠순 노인의 가슴이 얼마나 서글펐을까?
“아버지께서는 1942년 11월 22일 일제에 의해 이역만리 떨어진 남양군도로 강제연행 당하셨다가 1944년 4월 11일 전사하셨지요. 저는 그때 2살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몇 날 며칠 식음을 전폐하셨습니다.” 박남순 씨는 <강제동원 피해자에게 듣는다, 아직도 못다 한 한 맺힌 이야기들>에서 그렇게 아버지에 대해 증언을 했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경찰이라면 일본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아버지 박만수 씨를 만나러 나선 야스쿠니행을 가로막고 <갈 수 없다>고 밀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전사자 따님을 호위하여 야스쿠니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주어야 옳을 일이다. 피해자 유가족인 칠순 나이의 딸조차도 야스쿠니 방문을 가로막는 불순한 집단을 뒤로하면서 박남순 씨는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이놈들아! 아버지를 살려내라! 아버지를 야스쿠니에서 빼내 고향으로 모시고 가도록 해라! 이놈들아!’ 박남순 씨는 엉엉 소리 내 울었다. 답사단도 모두 함께 울었다. 2만 1,000여 명이나 되는 조선의 병사들이 태평양 바다에서, 이름 모를 남양군도에서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숨져갔을 그 외로운 영혼을 떠올리며 울었다. 그리고 아직도 군국주의 광분을 반성치 않는 일본의 뻔뻔스러움에 치를 떨었다.
일본은 패전 후 1947년 신헌법에서 정교(政敎)분리를 규정했음에도 1978년에 도조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戰犯) 14명을 합사하는 등 야스쿠니가 단순한 전몰자 추도시설이 아님을 여실히 증명했다. 1985년 나카소네야스히로가 총리로서 공식 참배한 이래 2000년에는 이시하라신타로 도쿄도지사가, 2001년 이후부터는 고이즈미준이치로 총리가 지속적으로 참배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일본은 야스쿠니참배를 공식화하고 있다. 정교(政敎)분리를 스스로 위배하고 있는 것이다.
경내에는 일본 육군의 아버지 오무라에키지 동상을 비롯한 전범들의 동상과 대형 함포, 각종 전쟁용 무기, 가미카제 돌격대 동상, 전함 야카토 특대형 포탄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전쟁유물 들을 많이 전시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군마(軍馬)와 군견(軍犬), 비둘기 동상까지 만들어 전시하고 있어서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마치 군국주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착각을 일게 하여 소름이 오싹 끼쳤다.
일본사회에서 야스쿠니신사는 일왕에 대한 금기처럼 오랫동안 ‘성역(聖域)’이라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야스쿠니에 의문을 품거나 문제를 제기하기는 어려웠다. 고이즈미 정권 등장 전까지 일본 내에서 야스쿠니와의 싸움은 주로 지방자치단체나 공직자가 야스쿠니 신사에 헌금 하는 등 예산을 쓰는 것이 정교분리 원칙에 위반이라하여 위헌 판결이 내려진 게 고작이었다.
▲ 한국·대만·일본 세 나라 시민단체가 한마음으로 연 학술회의(왼쪽), 학술회의 내내 우익들은 행사장 건물을 차량으로 돌면서 줄기차게 협박을 해댔다
그러나 ‘야스쿠니 무단합사 취하’와 ‘고이즈미 총리 참배 반대’의 목소리가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되었고 그런 가운데 2001년 6월 한국인 군인, 군속 생존자와 유족들이 합사 취하 소송을 제기했다. 그해 11월에는 일본 7개 지역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위헌이라는 소송이 시작되었다. 이 재판투쟁은 1990년대 초반부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한국, 대만 등 아시아에서 강제 동원된 피해자들과 이를 지원하는 일본 시민단체의 연대를 이뤄 추진하였다.
2004년 2월부터 시작된 위헌소송에 대한 판결은 후쿠오카 지방법원과 오사카 고등법원만이 위헌 판결을 내렸을 뿐 그 외 지역은 모두 기각되었다. 더구나 2005년 9월 오사카고등법원의 위헌 판결 직후 고이즈미 총리가 다섯 번째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강행하면서 야스쿠니문제의 완전해결을 위한 국제연대가 추진되었다.
한국은 2006년 5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이해부터 해마다 8월 한국·대만·일본 위원회 공동 주최로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오전에 야스쿠니방문을 저지당한 답사단은 오후 2시부터 저녁 6시 30분까지 나가타쵸에 있는 사회문화회관 강당에서 ‘2010 평화의 촛불을! 야스쿠니의 어둠으로 촛불행동’이란 주제 아래에 한일시민 합동으로 행사를 했다. 300여 석의 자리는 한일시민으로 꽉 찼으며 1부는 ‘식민지 지배와 야스쿠니’란 심포지엄이 있었고 2부는 한국의 이희자 씨, 오키나와의 가네코도모미 씨, 일본의 구마다이쿠코 씨의 피해자 증언 시간을 가졌다.
▲ 촛불행진을 하며 목이 터져라 ‘야스쿠니 반대!’를 외쳐대는 답사단
이어서 3부에는 콘서트와 시 낭독시간을 가졌는데 한국 가수 손병휘, 문진오 씨의 열창과 앞 못 보는 대만 원주민 모나농 씨의 잔잔한 시 낭독이 이어졌다. 끝으로 답사단은 무대에 올라 ‘아침이슬’을 열창했다. 이 자리에는 올해로 3년째 야스쿠니문제를 풍자만화로 고발하고 있는 상명대학교(지도교수 고경일) 학생들도 함께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다.
밖에서는 행사 내내 우익들이 차량을 동원하여 행사장 근처 길을 돌면서 확성기로 줄기차게 협박을 해댔다. 하지만, 한일 시민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진지하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함께했다.
심포지엄과 모든 내부 행사를 마치고 나니 밖은 슬슬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촛불에 불을 붙여 도로로 나왔다. 도로 가장자리를 따라 질서 정연하게 행진하는 한일시민들 주변에는 낮부터 심포지엄 주변에서 확성기를 틀어대던 우익들의 차량과 이를 막기 위한 경시청 차량들이 뒤엉켜 혼잡스러웠다.
우리도 질세라 작은 마이크를 들고 센소한타이(전쟁반대), 고우시한타이(합사반대)를 외쳐보았지만 화통을 삶아 먹은 듯 도쿄 시내가 떠나가도록 큰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우익들의 ‘어서 일본을 떠나라.’라는 따위의 방송 때문에 1시간여의 촛불행진이 끝나는 히비야공원에 도착할 무렵에는 귀가 얼얼하였다. 거기다가 찜통더위 속을 ‘야스쿠니반대’라는 구호를 고래고래 외쳐서인지 목도 쉬어버렸다. 온몸을 땀으로 뒤집어쓴 채 우리는 히비야공원에 모였다.
우익과 충돌없이 촛불행진을 마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공원에 모인 시민들은 내년을 기약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손에든 촛불이 꺼지지 않기를 기원했다. 촛불이 켜져 있는 한 우리는 하나였다. 일본의 양심 있는 시민들과 한국인들은 한목소리로 일본의 야스쿠니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온몸에서는 비 오듯 땀이 흘렀고 우리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 촛불행진을 하는 동안 길을 따라다니며 차량과 확성기로 협박하는 우익들
우리를 둘러싼 우익들의 가해 협박이 쉴 틈 없이 조여 오는 가운데 답사단은 히비야공원 한 구석에 미리 불러 놓은 전세버스에 올라탔다. 일본의 시민들과 동포들은 답사단이 탄 버스가 히비야공원 모퉁이를 지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오사카로 내려가는 야간 버스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 5시에 우리는 오사카에 도착했다. 전세 버스 안에서 새우잠을 잔 탓에 몹시 지쳐 있던 답사단을 위로해준 것은 찜질방이었다. 실로 11일 만에 제대로 휴식을 취해보는 시간이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한국식 찜질방에서 답사단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11일간의 답사길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기타큐슈 탄광, 고쿠라의 밤, 시모노세키의 똥굴동네, 사세보 미군기지, 나가사키의 오카마사하루기념관, 오사카 츠루하시 시장, 교토 우토로마을과 단바망간 기념관, 임진왜란 비극의 현장 코무덤, 도쿄 아라카와 학살 현장과 치바관음사 위령탑, 야스쿠니방문 저지와 촛불행동 등등 우리의 머릿속에는 잘 편집된 한편의 필름이 돌아가듯 지난 시간이 한 장면 한 장면씩 스쳐갔다.
중학교 3학년생부터 칠순을 넘긴 연령대의 답사단 구성원들. 나이도 나이지만 회사원부터 대학생, 교사, 기자, 작가, 목사, 연구원 등등 직업도 다양했던 45명이 떠났던 답사길이었다. 8월의 찜통더위 속이었는데도 단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모두 서로 아끼고 위하며 서로에게 힘을 실어 주었던 답사단원들은 서로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올해는 해방 65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이다. 국내외에서 많은 행사와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는 기념행사가 있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답사단은 알찬 여름을 몸으로 뛰었다. 그리고 서로 뜨거운 가슴을 확인했다. 이런 뜨거운 가슴을 답사단은 귀국해서도 이어가기로 다짐했다.
끝으로 답사를 기획한 민족문제연구소, 주관한 야스쿠니반대행동 한국위원회, 후원한 동북아역사재단, 한겨레신문사, 진실과 미래 국치 100년 사업 공동추진위원회의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답사단 여러분과 동고동락한 12일간의 추억을 글쓴이도 오래오래 잊지 않고 간직하고 싶다. <마지막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