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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백년편지 169 > 민족을 일깨워준 백범 선생 -박동환-

[그린경제 = 이나미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백범 김구 선생님!

 얼마 전 [백범일지]를 읽고, 세상 사람들이 선생을‘겨레의 스승'으로 부르는 이유를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는 제게 ‘민족’을 일깨워주신 큰 스승입니다.

   선생님께 몇 자 글을 올립니다.

  예부터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고, 어지러운 세상이 영웅을 부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생이 태어난 1876년은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으로 외세에 의한 본격적인 문호개방의 압박을 받기 시작한 때였고, 대내적으로는 장기간 지속되어온 세도정치의 폐단과 신분질서의 붕괴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조선과 명운을 같이 하듯, 선생께서도 어린 시절부터 모진 풍랑을 겪었습니다. 
 

1942년 중경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김구 선생의 모습

                                                                    
   선생이 이러한 역경 속에서 결단력, 추진력, 일에 대한 열정을 갖추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유없이 매질을 당했을 때, 충동적으로 반격한 것이 아니라 울타리 뒷문을 이용하여 치밀하게 상대 아이들을 ‘찔러 죽일’ 계획을 세우셨는데, 다행히(!) 실패하셨지만 흥분하지 않는 차분함이 돋보이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행동가,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보이는 대목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사물을 대하는 열정, 특히 학문에 대한 열정도 남다르셨습니다. 부친이 반신불수가 되고 의식주 하나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배움의 끈을 놓지 않으셨는데,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를 넘어 그곳에서 기숙하는 학생들이 깨기도 전에 먼저 도착하곤 했다.”는 구절에서 배움에 대한 강한 열망이 엿보입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열정이나 실력만으로 꿈을 펼 수 있는 건전한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신분매매가 성행해 너도나도 양반이 될 수 있었고, 국가고시인 과거의 당락조차도 뇌물에 의해 향방이 결정되는 지경이었습니다. 선생도 한때 이러한 사회모순에 좌절하게 되셨지요.

  선생은 이후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기도 하고, 안중근 의사의 부친과 인연을 맺기도 하셨습니다. 안의사가 하얼빈의거를 일으키기 10년도 전에 선생과 교류했다는 대목에서는 전율이 흘렀습니다. 근대사를 움직인 두 위인의 ‘우연한’ 교분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안진사의 지인인 고능선(후조 고석로) 선생과의 만남은 과거 낙방, 동학운동 실패로 인해 나아갈 방향을 잃은 선생에게 성현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삶의 철학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선생의 삶을 크게 바꿔놓은 치하포사건과도 연관이 깊습니다. 거사를 앞두고 고민하던 선생께서는,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은 가히 장부로다.”라는 후조선생의 가르침을 다지고 일본군 장교를 처단하는데, 스스로 정당한 일을 하셨다고 믿고 도망가지 않으셨습니다.

  국모 명성왕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놈을 때려죽였다는 선생의 말씀은, 선생을 일약 대중적 명사로 만들었습니다. 첫 수감생활부터 사형수로 시작하게 되셨는데, 형 집행 직전에 극적으로 고종이 특별 사면한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이처럼 첫번째 옥중경험은 본래 의도와는 달리 선생의 명성을 널리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종의 특사 후 파옥을 감행한 선생께서는 이후 방랑길에 올라 삼남지방을 떠돌기도 하고, 중이되어 마곡사에 머물기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단순히 서구문명을 오랑캐라고 배척만 하는 것은 옳지 않고, 옳은 것, 효율적인 것은 취해야 마땅하다는 입장을 가지게 되시는데, 이는 편협한 성리학적 가치관에서 근대적 사고로의 성공적인 이행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께서 후조선생과 나누 대화에서 그 이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머리를 천 길이나 길러도 왜놈이나 양놈이 그 상투를 무서워하지 않으면 어찌하겠습니까?.......지금부터라도 문명교육제도를 본받아 학교를 세우고 2세들을 건전하게 양육해야 합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 선생은 민족독립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고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무장했습니다. 옥중심문을 당하는 도중 일본경찰 앞에서 머리를 기둥에 부딪쳐 자살을 시도하는 등 의지의 극단을 보여주셨습니다. 이후 임시정부의 수장이 되기까지, 그리고 그후에도 숱한 고난을 겪게 되십니다.   

김구선생과 한인애국단원 (1932)

  왜 우리 민족은 세계사적 격동기에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는 일을 당해야 했을까요? [백범일지]를 읽는 내내 선생께서 형극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이런 이유로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그 해답의 단초로 민족의식의 결여가 눈에 띄었습니다. 조선이 19세기 말 20세기 초부터 동아시아 역사에서 종 노릇, 주변부 국가에 지나지 않게 된 배경에는 민족의식 부재가 큰 역할을 했었습니다. 선생께서 지적하셨듯이, 많은 조선 사람들은 경술국치 이후에도 국권이 침탈당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고려 이후 지속되어온 중국과의 종속관계가 너무 오랜 시간을 경과한 때문으로 짐작됩니다.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라 알고 있습니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국경구분이 명확해지고, 국가간의 경계를 유지, 감시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게 되는데, 이러한 구분에 바탕을 두어 구성원 개인들을 더욱 결집하게끔 만든 개념이 민족입니다. 민족이라는 단어로 사람들은 더 효율적으로 통합되고 동원될 수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과 성공적인 근대화, 효과적인 민족의식의 발현으로 19세기 말부터 동아시아의 패자(Ruler)로 등장할 수 있었습니다. '덴노’(천황)를 정점에 둔, 유럽의 국가들과는 다른 일본식 민족주의는 국민들의 무서운 단결력을 통해 1945년까지 일본의 경제적, 군사적, 문화적 성장을 이끄는 동력이 됩니다. 물론, 개인을 부정하고 전체주의에 치우친 결과 연이은 침략전쟁을 도발하고 종국에는 참담한 패망을 맞이하고 말았지만요!

  건전한 민족주의는 당시 조선의 명운을 위해서 필수적인 요소였음이 분명합니다. 근대의 개념이 늦게 유입된 조선에서는, 백성들이 국가보다는 ‘촌락·혈연 공동체’의 맥락에서 삶을 살아왔고, 국왕을 국가의 지도자보다는 아버지 같은 ‘나랏님’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즉, 집단에 대한 인식이 협소한 마을 단위에서 더 확장되지 못한 것입니다. 지역·학파·문중에 따른 민력 분산으로 일본을 비롯한 근대국가에 비해 범국민적인 통합을 이루기 어려웠기 때문에, 조선은 외세의 침략 앞에서 그 힘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각개격파를 당한 측면이 큽니다.

  최근 학계나 사회에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을 한물간 구시대의 유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한데, 지난 세기 참담했던 우리 역사와 이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한 선열의 참된 모습을 담은 민족의 전범 [백범일지]를 가슴으로 일독해 보기를 권합니다. 민족의 진정한 가치와 개념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자유와 정의가 선생이 절규한 민족독립의 이상적 가치임을 새삼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백범 선생님!

  선생께서 [백범일지]를 통해 저에게 일깨워준 최고의 가치는 곧 민족이었습니다. 선생께 깊은 감사와 존경을 드리며, 국가와 사회에 유위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지하에서나마 영면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박동환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2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