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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민족

인천신사가 있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를 찾아 <2>

황국화 상징 조선의 신사(神社) 돌아보기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인천신사(仁川神社) 가 있던 곳을 찾아 가던 날은 8월 더위가 막바지에 달하던 때라 몹시 더웠다. 일본인 작가 도다이쿠코(도서출판 토향 대표)씨는 무더운 더위임에도 인천신사가 있던 곳을 안내해주었다. 신사가 위치한 자리는 지금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서 있는 자리였다.(인천광역시 중구 인중로 146번지)

 먼저 학교 정문 입구 언저리에 차를 세우자마자 담장 쪽으로 걸어가던 도다이쿠코 씨는 한 오십 보 정도 걸어간 곳쯤에서 멈추어 서서 학교 담장을 가리켰다.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신사 앞에 놓였던 돌이 담장 마감 재료로 쓰고 있는 현장이었다. 일부 시멘트 부분 끝자락에 잇대어 있어 확연히 알 수 있지만 무심코 지나가면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담장을 둘러 본 뒤 우리는 교문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오르니 인천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일 만큼 전망이 좋았다. 

   

▲ 인천신사 모습

   
▲ 신사 입구를 알리는 도리이

 일제는 조선에 신사를 세울 때 남산신궁처럼 그 지역에서 전망이 가장 좋고 신성하다고 여기는 곳에 신사 터를 잡았다. 인천신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본관 앞에 나란히 서 있는 1개의 석등과 2개의 도리이(신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운 신성구역을 표시하는 문) 는 명백한 인천신사(仁川神社)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는 자료이다.

   
▲ 지금도 남아 있는 도리이(안쪽에서 찍은 모습)

 인천신사는 인천에 일본 거류민이 증가하자 1889년 하야시 겐스케(林權助) 일본 영사가 기부금을 모금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1915년(대정 4) 공사비 약 1만 5천원으로 개축을 하게 된다. 신전(神殿)은 1928년(소화 3) 지역 유지의 헌납금으로 제관(齊官), 참롱소(參籠所), 동서의 대옥(大屋)을 증축하였고, 1931년(소화 6) 4월 황대신궁 구전의 재료를 얻어서 수선을 완료하였다. 당시 신사의 규모는 경내지 4,744평, 기타 경외지가 948평이었다.

 인천여상의 교사(校舍)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운동장은 제법 넓어보였다. 도다 씨는 정문의계단을 올라 오른쪽으로 필자를 안내했는데 그곳에는 등나무 벤치가 놓여있었고 학생 몇 명이 앉아 재잘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등나무 벤치가 놓인 밑바닥에도 신사건물에 쓰던 돌 부재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간 곳에는 풀들이 아무렇게나 자란 작은 공원이 나타났는데 그곳에는 신사 앞마당에 있었던 사람 키보다 큰 석등이 놓여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바로 옆에는 돌로 만든 그다지 크지 않은 도리이가 있었고 돌계단이 몇 개 있었는데 이는 당시 모습 그대로 보존된 느낌이다. 이곳에 신사 본전을 짓고 명치천황 신을 모시면서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던 사실을 이 학교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 신사에 있던 건축부재들이 교정 곳곳에 있다.

   
▲ 웃자란 나무 안쪽에 석등이 보인다.

   
▲ 학교 담장 마감재로 쓰고 있는 신사의 건축 부재

 먼저 신사 터를 살피고 돌아온 필자는 곧바로 이 학교 이임순 교장 선생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바로 전화를 걸어 왔다. 요점은 그곳이 신사 터라는 것은 알지만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혹시 그간 학교에서 만드는 교지(校誌)에 신사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는 것이 없나하고 물었다. “없다”고 했다. 인터넷 상에 있는 인천여상의 안내에도 그런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면서 교장 선생은 나에게 인천학을 공부하는 분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사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인천신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보다는 인천여상이 인천신사 터에 자리를 잡고 68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교정에 있던 인천신사에 대해 어떻게 기록해두었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교장 선생은 ‘그런 것이 없다’고 했다. 필자가 여기서 교장 선생을 탓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럴 자격도 없다. 다만 교지(校誌)나 ‘인천여상역사’ 책 같은 것을 만들면서 자신의 학교 교정에 나뒹구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황국신민화 역사’에 대해 이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아쉬웠을 뿐이다.

   
▲ 인천신사는 인천 시내가 내려다 보일 만큼 높고 신성한 터에 자리잡았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일본 신사 터를 잘 보존하자는 것도 아니요, 강제적으로 기억하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천신사 터에 다음과 같은 팻말 하나라도 세워 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은 인천시나 국가가 하기 전에 학생들에게 역사의식을 올바르게 심어주는 차원에서도 인천여상이 진작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 자리는 과거 식민지시대에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조선인을 황국신민화 하려던 의도로 인천신사를 세웠던 터이다. 이곳 인천신사 터에 나뒹구는 건축부재들이 그 명백한 증거물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쓰라린 역사를 되새기고자 한다.”

 

*신사명(神社名):인천신사(仁川神社)

*소재지: 경기도 인천부 궁정(京畿道仁川府宮町), 현 (인천광역시 중구 인중로 146번지,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

*제신(祭神):천조대신(天照大神), 명치천황(明治天皇)

*창립: 1916연(대정5년) 4월 24일

*사격(社格):도공진사(道供進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