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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산은 부여를 바로 보게 한다(제1경)

<윤재환의 신부여팔경> ③

[그린경제=윤재환 기자]  부여를 찾는 대개의 사람들은 으레 부소산에 오른다. 아침 일찍 부소산에 올라 새벽안개가 덜 걷힌 백마강을 바라보며, 미처 알지 못하는 백제의 옛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저녁 부소산에 오르면 반월루(半月樓)에 올라 부여 읍내를 내려다본다. 아담하게 명멸하는 가로등 불빛들이 나그네의 시선을 나름대로 사로잡는다. 그러나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든다. 눈에 확 띄는 유적도 없고, 왕도였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왜소한 읍내 탓이다. 

   
▲ <신부여팔경>의 제1경인 금성산에 올라 바라본 2010년 부여 읍내

그래서일까. 가람 이병기 선생은 <낙화암>이란 기행문에서 부여의 첫 인상을 이것이 과연 부여 고도(古都)란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왕도의 위용은커녕 작은 시골 읍내의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곳이 부여다. 그러나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1948년 자신의 출판사 동명사에서 펴낸 조선의 고적에서 부여를 이렇게 적고 있다.  

고적이라 하면 묵은 자취요, 꿈된 옛날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쓸쓸하고 서럽고 한탄을 자아내게 생겼을 것은 물론이지만, 개개의 고적이 죄다 추창 적막의 느낌을 주는 것으로 금새가 정해 있지 아니 합니다. - 중략 고적, 그것의 본질은 원래 같지 않아서 그 느낌도 다른 점이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고도(古都)인 평양, 부여, 경주에서 얻는 느낌도 각별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형으로부터 오는 것도 있고, 나라를 세울 때의 사정으로부터 온 것도, 또 문화의 내용과 유물의 상황에 말미암은 점도 있음이 물론입니다.  

평양에 가면 어머니의 품속에 드는 것 같고, 경주에 가면 친한 벗을 대하는 것 같으며, 평양에서는 장쾌한 생각이 나고, 경주에서는 옥죄는 신경이 풀어지는 맛이 있으며, 평양은 적막한 중에 변화가 일어나고, 경주는 번화한 중에 적막이 숨어 있는데, 백제의 부여는 때를 잃은 미인처럼 그악스러운 운명에 부대끼다 못한 천재 같이 대하면 딱하고 섧고, 눈물조차 그렁거리고, 가만히 생각해 들어가면 어떻게 마음을 붙잡을지 모르는 경계까지 이르게 됩니다. 

얌전하고 존존하고 또 아리따운 곳이 부여입니다. 적막할 대로 적막해서 안팎이 적막한 곳이 부여입니다. 사탕은 달 것이요, 소금은 짤 것이요, 역사의 자취는 쓸쓸할 것이라고 값을 정한다고 하면, 이러한 의미에서의 고적다운 고적은 아마 우리 부여라 할 것입니다. 

부여는 남국적(南國的) 풍물을 가졌습니다. 부드럽고 훗훗하고 정답고 알뜰한 맛은 부여가 아닌 다른 옛 도읍에서는 도무지 얻어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고적을 심리적으로 종류를 나눈다고 할 것 같으면 평양을 의지적(意志的) 고적이고, 경주는 이성적(理性的) 고적인데 견주어 부여는 감정적(感情的)이라 할 것입니다. 부여에서는 다만 감정적이라고 하기보다는 한편으로는 관능적(官能的)이라고도 하겠고, 더 절실히 촉감적(觸感的)이라고도 할 고적의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부여에서는 심각한 사색에 잠길 수도 없고, 침통한 시편을 기대할 수도 없으며, 다만 안타까운 북방적(北方的) 피리, 극한적인 애절의 날나리 곡조에 맞추는 가늘고 슬프게 읊조리는 민요를 찾을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 아래서 생긴 민요가 아마 산유화(山有花)라는 타령이겠지요. “(편집자 일부 수정 정리) 

위 글은 원래 최남선이 강연한 것을 모은 것인데, 그토록 고적다운 고적은 부여 밖에 없다고 예찬한 부여지만, 오늘날 그것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백마강을 가로지르는 백제대교를 비롯해 사통팔달로 도로가 쭉쭉 내닫고 있다. 이제 고도 부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부여에 오면 먼저 금성산에 올라 부여 전체를 조망해보아야 한다. 그래야 백제 부여를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백제 시대 나라의 위급한 소식은 봉화로 알렸다. 당시 봉화는 통신의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사방 어느 곳에서든 눈에 띄는 장소에 봉화대가 마련되었다. 부여에서 봉화대가 설치된 곳은 금성산이다.  

삼국유사2 “남부여편에 보면 고을 안에 세 개의 산, 곧 일산(日山), 오산(吳山), 부산(浮山)이 있는데, 백제 전성기에는 그 산 위에 신령한 이가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날아서 내왕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부산은 규암면 진변리 백강마을 뒷산으로, 현재도 부산(浮山)으로 불리고 있다. 오산은 능산리 왕릉 앞 오산마을과 염창리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는 오석산(吳石山)으로 불리고 있다. 일산은 부여 읍내의 동편에 있으며, 현재는 금성산 또는 남산으로 불리고 있다 

   
▲ 1934년 <고적명승사진첩>에 실린 부산(浮山), 어부들이 고기를 잡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위의 작은 사진은 부산 기슭에 있는 대재각 모습.

이들 산은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으나 주변 산에 견주어 확 트인 시야를 확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요즘에고 가끔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다. 특히 금성산에서는 백제시대의 돌벼루[石硯]이 발굴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금성산 마루에서 부여 읍내를 내려다보면 부소산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북쪽으로는 백마강이 둘러있고, 남쪽으로는 들판이 펼쳐져 있다. 그러니까 부소산을 진산(鎭山, 고을의 뒤에 있는 큰 산)으로 삼아 겹겹으로 산성을 쌓았고, 남쪽 기슭에 왕궁을 앉힌 것이다. 다시 말해 부소산성으로 들어가는 정문 일대가 왕궁지로 추정된다. 

이 왕궁지 남쪽으로 관가인 육좌평(六佐平)이 있을 것이고, 그 남쪽에 정림사가 있었고, 민가 그리고 그 남쪽에 궁남지(宮南池)가 자리 잡은 형태이다. 참으로 사비성은 단순하면서도 정연한 계획 도성이었다고 생각된다.  

무왕의 탄생 이야기가 깃든 궁남지는 포룡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연못 주위로는 오래된 버드나무가 둘러싸고 있다. 궁남지는 백제 궁궐에 조성된 정원의 으뜸이며, 우리나라 정원 조경의 처음이라 볼 수 있다.  

그 남서쪽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군수리 절터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과 1936년 두 차례 발굴을 통해 중문(中門)금당강당이 남북으로 배열된 11금당식 가람임이 밝혀졌다.  

이곳 목탑터 주면에서는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 제330)과 납석제불좌상(보물 제329)을 비롯하여 금가락지장신구소옥(小玉) 1,150여 점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칠지도가 발굴되어 크게 주목을 끌었다. 

규암면 진변리의 백마강을 낀 부산(浮山)동쪽 언덕에는 대재각(大哉閣)이 있고, 그 안에는 자연 암반에 글씨를 새긴 각서석(刻書石)이 있다. 서체가 힘차고 강해 금석학 연구 자료로 가치가 높다.

   
▲ 1900년 대의 대재각

   
▲ 대재각 안에 있는 각서석. “지통재심일모도원(至痛在心日暮途猿)”이란 글씨는 우망 송시열이 썼다. 그 뜻은 “지극한 고통은 마음에 있으나,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구나.”이다.

1657(효종 8)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1586~1657)가 잉완송시열과 함께 청나라를 쳐야한다는 불벌계획 장계를 올렸는데 임금이 답을 내렸다. 그 내용 중에 성이지통재심일모도원(誠以至痛在心日暮途遠)이 있었다. 

훗날 이를 우암 송시열이 지통재심일모도원(至痛在心日暮途猿)”이라 써서 이경여의 아들 이민서에게 주었고, 손자인 이이명이 1700(숙종 26) 현재의 자연 암반에 글을 새기고 이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전각 이름을 대재각(현판은 정향 조병호가 썼다.) 이라 한 것은 이경여가 효종이 내린 답을 읽고 <상서(尙書)>대왕재언(大哉王言)”이라 한데서 따온 것이라 한다. “지극한 고통은 마음에 있으나,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구나.” 라고 한 효종의 마음과 북벌을 기필코 해야 한다는 신하의 제안이 소통의 의미로 와 닿는다.  

이곳 주변에는 이경여가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가져온 매화 세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두 그루는 죽고, 한 그루만 살아남았는데, 고목이 된 그것마저 일제강점기 때 불타버렸는데 그 후세가 봄마다 매화꽃을 피우고 있다. 

그런데 원래 심었던 세 그루는 동지 때마다 꽃이 핀다 하여 동매(冬梅)로 불렸다. 추운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동매에서 올곧게 사는 선비정신을 우리는 읽어 왔다.  

이처럼 금성산에 오르면 고도 백제의 여러 가지 흔적을 볼 수 있었고, 상상할 수 있다

 
<윤재환의 신부여팔경 제1편 동영상 보기>

 


                            * 자세한 내용은 윤재환의 신 부여팔경》, 스펙트럼북스,  2010 참고
 

(다음 제4편은 부소산은 부여의 가슴이다.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