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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즐거우나 넘치지 않고 슬프기는 하나 비통하지는 않구나!

[국악속풀이 125]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난 주에는 가야금의 2종류로 법금과 산조 가야금이 쓰이고 있는데, 법금이 원형이고 산조가야금은 19세기 말, 산조음악이 잉태되면서부터 민속악에 널리 쓰이게 되었다는 점, 한자음으로 가야금(伽倻琴)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가얏고'가 원래의 이름이란 점, 6세기경에는 이미 <고> 라는 현악기가 있었다는 점, 우륵이 지었다고 하는 하가라도(下加羅都)를 비롯한 12곡명의 소개, 그리고 음악이란 진정 만국의 공통어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점들을 이야기하였다.

가야국의 악사였던 우륵(于勒)은 가실왕의 요청대로 12곡을 짓고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가야금을 안고 신라의 진흥왕에게 투항하게 된다. 진흥왕은 우륵을 지금의 충주 지방에 머물게 해 주었다.
신라 땅에 들어온 우륵이 할 일이라곤 가야금을 뜯는 일 외에는 달리 없었다.

뒷동산에 달이 뜨면 고향땅을 바라보며 가야금을 만졌고, 꽃피는 봄이 되면 두고 온 고향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가야금을 뜯었던 것이다. 가야금을 타면서 하루를 시작하였고 가야금을 타면서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 했다.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자리를 탄금대라 하여 지금도 충주지방에서는 자랑거리로 여기로 있고 충주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탄금대가 우륵이 가야금 타던 곳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당시 우륵이 머물던 국원(현 충주지방)은 당시 고구려와 접경을 이루고 있던 곳으로 얼마전까지만 해도 고구려비나 입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기도 하는 지역이다.

   
▲ 신윤복의 청금상련 (廳琴賞蓮, 종이에 채색, 35.3 x 28.2 cm)

어느 날 그곳을 순시하던 진흥왕은 우연히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 듣게 되면서 우륵과의 조우(遭遇)가 시작되는 것이다. 우륵이 타고 있던 가야금 소리에 넋을 잃은 진흥왕은 그 훌륭한 음악을 신라의 청년들에게 지도해 줄 것을 청한다. 그래서 우륵의 제자로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그 유명한 법지(혹은 주지로 쓴 기록도 있음)와 계고, 만덕이라는 사람들이다. 우륵은 3인의 제자에게 각각 가야금을 가르치되, 특히 법지에게는 노래를 , 그리고 만덕에게는 춤도 지도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악기, 노래, 춤, 즉 악가무(樂歌舞)가 별개의 장르처럼 인식되고 있으나, 예전의 개념으로는 이 세 가지가 다 악(樂)이라는 개념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형문화재 1호인 종묘제례악의 경우에도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들의 합주와 함께 악장(樂章)이라고 하는 노래가 따르고, 팔일무(八佾舞)라고 하는 의식춤이 함께 연출되고 있어서 악가무가 종합적으로 편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륵선생의 12곡을 3인의 제자가 거의 다 배워 갈 무렵, 제자들은 선생의 음악이 번거롭고 음탕해서 아정치 못하다는 의견에 합의를 하기에 이른다. 생각도 못할 일이다. 그러면서 12곡을 부분적으로 줄이고 삭제하여  5곡으로 줄이자는, 즉 편 작곡을 새롭게 하자는 결정을 하고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선생의 음악이 아정치 못해 새로 고쳐 만든다는 발상도 어렵고 실행에 옮기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거늘 3인의 제자들은 신라인들의 정서를 위하여 과감하게 12곡을 5곡으로 줄여 개작하였다.  당연히 선생은 못마땅해 하면서 화를 냈다. 우륵 뿐 아니라 누구라도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다. 제자들이 선생의 음악을 배운 다음 함부로 뜯어 고치다니 웃고 넘어 갈 선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우륵선생은 보통의 음악인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제자들이 고쳐 만든 곡들을 끝까지 감상한 다음에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것이야 말로 바른 음악이라고 극찬을 하는 것이었다. 이때 우륵이 감탄하며 남긴 말이 그 유명한 낙이불류(樂而不流)애이불비(哀而不悲). 직역하면 즐거우나 넘치지 않고 슬프기는 하나 비통하지는 않구나!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