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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은 부여의 가슴이다(1)

부여문화통신 4

   
▲ <신부여팔경>, 고암 정병례, 돌, 2007

[그린경제=윤재환 기자]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鎭山, 도읍지나 각 고을 뒤에 있는 큰 산)이다. 그 남쪽 기슭이 538(성왕16) 이후 123년 동안 백제의 왕궁지였다. 그러니까 부소산은 진산 겸 빽제 왕궁의 후원 구실을 했던 것이다.  


부소산의 북쪽 편을 감아 도는, 다시 말해 규암면 호암리 천정대 앞에서 세도면 반조원리까지 약 16km 정도의 금강을 우리는 백마강이라 부르고 있다. 


백제시대의 백마강은 여러 가지 역할을 했다. 나라 안팎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교통로였고, 외적의 침입을 막는 장애물, 곧 해자 역할도 했다. 또한 풍부한 농수원 구실도 했다. 그래서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한결같이 강을 끼고 발달했던 것이다. 


백제 역시 한강 유역인 하남 위례성에서 B.C. 18년에 온조가 개국한 이래 22대 문중왕 원년(475) 웅진(공주)의 금강변으로 잠시 도읍을 옮겼다가 26대 성왕 16(538)에 사비(부여)의 백마강변으로 천도하여 백제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그 꽃은 활짝 피지 못한 채 제31대 의자왕 20(660) 718일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삼국유사2 <남부여> 편에 보면, ‘부여군은 옛 백제의 도읍지인데 일면 소부리(所扶里)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도 백제 성왕 16(538) 봄에 서울을 사비(所扶里)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이는 아주 먼 옛날 백제의 뿌리인 북부여의 이름을 되살린 것이며, 백제 임금들의 성()이 부여(扶餘)라는 것과도 상관된다.’라고 적혀 있다. 


부여하면, 부소산이나, 낙화암이나, 고란산나 백마강을 먼저 떠올린다. 낙화암(落花巖)은 부소산성(일명반월성)이 나당(羅唐)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자 삼천 궁녀가 수십 길 낭떠러지로 뛰어내린 곳이라 알려져 있다. 황당한 구석이 있는 전설이다. 하지만 적군에게 항복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우국충정의 몇 사람이 자결한 현장이라고 하면 훨씬 귀가 솔깃해질 것 같다 
 

   

                    ▲ 이종구, <낙화암>, 캔버스에 아크릴릭, 91×73, 2007



삼국유사에는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에서 이곳을 타사암(墮死巖)’이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누군가에 의해 꽃이 떨어진 바위라는 뜻의 낙화암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잘 모르고 있다. 그 낙화암 낭떠러지 중턱에는 주홍색의 落花巖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씨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낙화암 절벽 아래에는 아담한 절 고란사가 있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뿐 , 자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절 뒤 바위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위쪽 바위틈에 고란초가 자란다. 


고란초는 고란초과(皐蘭草科)에 속하는 상록다년초인데 산 속 그늘진 바위틈이나 벼랑에 붙어 자란다고 한다. 뿌리줄기는 옆으로 길게 뻗으며, 마디마디에 고사리 잎처럼 생긴 잎이 달려 있다. 약간 두껍고 윤이 나는 홑잎이지만 가끔 두세 갈래로 갈라졌으며, 뒷면은 진한 초록빛이지만 아랫면은 하얀빛을 띄고 있다. 그러나 저러나 고란사 뒤 바위틈에는 현재 고란초가 몇 잎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 김현철, <백화정>, 한지에 수묵담채, 53×26cm, 2007



백제 임금들은 이 고란정 약수를 즐겨 마셨는데, 그때마다 고란초 잎을 한 잎씩 띄워 마셨다고 한다. 거기에는 어린이가 된 할아버지의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옛적 소부리 한 마을에 금술 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자식이 없었다. 할머니는 이제라도 회춘하여 자식 갖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어느 날 할머니는 일산(日山, 금성산)에 사는 도사로부터 고란사 뒤 약수와 고란초에 대한 효험을 듣게 된다. 다음날 새벽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그 약수를 마시고 오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저녁이 늦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일찍 할머니는 약수터로 찾아갔다. 한데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갓난아기가 할아버지 옷을 입고 누워 있었다. 할머니는 순간 약수 한 잔을 마실 때마다 3년 씩 젊어진다는 말을 할아버지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갓난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아기를 고이 길렀으며, 그 아이는 훗날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좌평(佐平)에 올랐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고란사는 원래 백제 임금들을 위한 정자였다고도 하고, 구중의 내불전이었다고도 한다. 또한 백제가 멸망할 때 당시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넋을 위로하기 위해 고려 현종 19(1028)에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현재 절집은 1900년도에 은산면 각대리에 있던 숭각사(崇角寺)를 헐어서 옮겨 지은 것을 1959년 수리한 것이라 한다. 


   

▲ 고란사 현판, 글씨를 쓴 이는 해강 김규진이다. 그런데 여느 절집 현판과 다르다.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절 이름을 쓴 것은 예외가 아닌데, 양 옆 여백에 난을 쳐놓았다. 죽농거사 안순환의 솜씨다.


고란사(皐蘭寺)”하는 현판 글씨는 1921814일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고란사를 방문했을 때 쓰고. 죽농거사(竹農居士) 안순환(安淳煥)이 난을 친 독특한 모습을 한 채 이곳을 찾는 이들을 맞이한다
 

   
▲ 소송 김정현,<고도춘색>, 종이에 수묵, 91×52cm, 1968, 봄철 부여 낙화암 일대를 정갈하게 표현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