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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방이 용을 낚은 조룡대

[부여문화통신] 부소산은 부여의 가슴이다(2)

[그린경제=윤재환 기자]  부소산 산책은 여러 경로로 접근할 수 있다. 대개는 왕궁지로 알려진 정문으로 들어가 시작하지만, 거꾸로 구드레나루에서 황포돛대를 올린 배를 타고 백마강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배에서 내려 고란사로 올라가기 직전 눈여겨볼 것이 있는데 하찮은 바위 하나다. 

당나라 소정방이 사비성을 함락하기 위해 부소산 기슭에 배를 대려고 했으나 물결이 거세어 도저히 댈 수가 없었다. 소정방은 꿈속에서 의자왕의 아버지인 무왕이 백제의 수호신인 용이 되어 심한 격랑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용을 잡으려면 백마를 미끼로 삼으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무왕이 평소 백마를 좋아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드디어 백마 미끼를 삼킨 용이 몸부림을 치자 소정방은 죽을힘을 다해 낚싯줄을 감아 채 용을 잡는다. 그 용을 낚은 바위를 낚을 조() 자를 써서 조룡대(釣龍臺)라고 한다. 이 바위에는 지금껏 소정방의 발자국과 용과 씨름하던 낚싯줄 자국이 남아있다. 그래서 백강(白江) 아니 백마강(白馬江)이 탄생했다고 한다.  

1988103살로 세상을 떠난 필자의 할머니는 조룡대 전설을 들려주실 때마다 당시 수심은 명주실 세 타래를 풀어야 할 만큼 깊었다고 한다. 멸망한 백제의 한은 그렇게 깊은 수심 속으로 가라앉았던 것이다

몇 해 전 필자는 이곳 풍경을 모두 아우른 한 폭의 그림을 접했다. 한국은행 전시실에서 <봄의 정경>이란 주제로 소장품전이 열렸는데 수묵담채로 종이에 그린 <고도춘색(古都春色)>이란 소송(小松) 김정현(金正鉉, 1915 ~ 1976)의 그림이 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되었다.  

화면 왼쪽에 부소산을 그리고, 그 기슭에 고란초와 약수 전설을 간직한 고란사를 그렸다. 낙화암 절벽에는 연두색 풀잎과 울긋불긋 진달래가 피었다. 화면 가운데로는 백마강이 흐르고, 범선도 그려 넣었다. 부소산 마루에는 사자루, 낙화암 꼭대기에는 백화정을 그려 화면에 여유로움을 주었다. 

화면 오른쪽으로 부산(浮山)이 그려졌고, 그 기슭에 대재각이 있어 북벌을 꿈꿨던 효종 임금의 마음도 읽을 수 있었고, 멀리 자온대와 그 위 수북정도 눈에 들어왔다.  

백제의 한이 서린 낙화암 절벽은 역삼각형 구도로 표현하여 화면에 긴장감을 주었다. 한국화의 구성 요소를 고루 지녔으면서도 부소산 북쪽 백마강 전경을 모두 소개한 한 폭의 탁월한 실경화였다.  

고란사 왼쪽으로 오르막길을 천천히 오르면 그 꼭대기에 백화정(百花亭)이 나온다. 1929년 당시 부여 군수 홍한표(洪漢杓)의 발의로 부풍시사(扶風詩社)라는 시우회(詩友會)가 건립하어 풍류의 장소로 삼았던 장소이다. 

   
▲ 이희재, 백화정, 2009

   
▲ 백화정 현판 / 글씨:석정 안종원(위), 글씨:우하 민형식

백화정이란 이름은 소정파가 지은 강금수수백화주(江錦水樹百花舟)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현재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하나는 석정(石丁) 안종원(安鍾元)이 썼고, 다른 하나는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 1875~1947)이 썼다. 

백화정을 지나 10여 분 정도 더 오르면 사자루가 있다. 이곳은 원래 백제시대 임금과 귀족들이 달을 보며 하루의 국정을 되돌아보고, 마음을 정리하던 송월대(送月臺) 터였다고 한다. 그런데 1824(순조 24)에 지어진 임천 관아의 개산루(皆山樓) 건물을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 사자루라 했다는 것이다. 

사자루 편액은 의친왕 이강 공이 기미 독립만세운동(1919)이 있던 5월에 직접 썼고, 반대편에 걸린 백마장강(白馬長江)은 해강 김규진의 글씨인데 서체 한 자 한자가 도특한 매력을 지녔다. 

   
▲ 1919년의 사자루. (일제강점기 엽서)

   
▲ 사자루 앞쪽 현판 글씨:의친왕 이강 공(원내), 백마강쪽 현판 글씨:해강 김규진

해강일기(海岡日記)에 따르면 1921814일 김규진은 사자루에 올라 경치를 감상한다. 그리고 816일에 논산 관촉사 미륵불을 본 뒤 서울에 도착한다. 이어 820일 사자루의 편액을 백마장강(白馬長江)”이라는 네 글씨로 쓰면서 서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자는 반월성 반월강산의 태극수, 태극의 지형에서 취했고, ‘자는 백마가 재갈을 풀고 풀밭에 누워 고개를 돌고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취했으며, ‘자는 사비강 물결이 바람을 맞고 일어나고, 길게 흘러가며 쉬지 않는 기세에서 취했으며, ‘자는 반을 물, 반은 흙인 금수강산이 억 년 동안 쉼 없는 데서 뜻을 취하였다.  

편액의 서체 하나에도 이 같은 작가의 뜻이 담겨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고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