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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최창남 빠지면 계약도 흥행도 되는 게 없었어요!

[국악속풀이 127]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금 속풀이는 가야금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우륵의 가야금 음악을 신라의 대악으로 삼으려는 진흥왕과 이를 적극 말리는 신하들의 의견이 대립되는 장면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은 보통 임금이 아니었다. 가야는 망한 나라이고 가야금은 망한 나라의 음악이니 절대로 받아드릴 수 없다는 신하들의 반대 이유는 진흥왕의 악하죄호(樂何罪乎), 즉 음악이 어찌 죄가 된단 말이오!! 이 한마디로 결판이 나 버린다.

과거 전통사회에서 가야금은 기녀(妓女)들이 가까이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까지도 가야금을 기녀들의 악기로 보려는 시각은 옳지 않은 것이다. 남다른 안목과 판단력을 지녔던 진흥왕의 존재가 곧 가야금의 오늘을 이어준 결정된 계기가 되었음을 생각해 볼 때, 한 유능한 지도자의 능력이나 판단, 그리고 결단은 역사를 바꾸고도 남는다는 점을 알게 만든다. 잠시 이야기를 바꾸어 이번에는 10월 1일 삼성동 소재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경서도 소리판을 벌이는 최창남 명창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축하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로 하겠다.
 

   
 

경서도 소리의 원로, 최창남(崔昌男) 명창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올해에도 제자들과 함께 소리판을 벌인다고 해서 또 한번 화제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나이 80이면 하던 일도 접어야 할 판인데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은 과연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의 주장은 늘 한결같다. 즉 새로움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전통을 잊지 않고 충실히 지켜가며 포장되지 않은 그대로를 제자들에게 전해주려는 충정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신체의 건강은 예전만 못하지만, 노 명창의 집념만큼은 누구도 따를 수 없기에 존경의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최창남 명창은 나라가 인정한 경기 입창(선소리)의 예능보유자이다. 그러니 그의 발표회에서 산타령은 빠질 수 없는 종목이다. 입창(立唱)형식의 이 노래는 좌창의 12잡가와 함께 경기소리의 대표적인 노래로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잦은 산타령>을 차례로 연창하는 형식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예로부터 예인집단에 의해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절에서는 불교의 의식이 끝난 후 산타령과 민요로 일반 대중을 위로하였다고 하며 도시와 농촌에서도 넓은 마당에서 불을 밝히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했던 노래이다. 특히《산타령》은 답교(踏橋) 곧 다리밟기 놀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노래로 알려져 있다.

1900년대 초반까지도 서울의 왕십리와 뚝섬을 잇는 <살고지다리>의 정월 대보름 답교놀이는 유명하다. 이날 밤에는 서울과 인근의 산타령 패(牌)들이 전부 모여서 목청을 높여《산타령》을 부르며 밤을 새워 흥겹게 놀았다고 한다. 100년 전의 합창 잔치로 생각하면 된다. 서울시민의 잔치마당에 율동을 곁들인 합창단들이 저마다의 기량을 들어내고 시민들과 함께 즐기던 주요 종목 중 하나가 바로《산타령》이었다는 말이다.    

산타령은 원래 서서 불러야 제멋인데, 최창남 명창은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그 후유증으로 앉아서 부르는 점이 가슴 아프다. 아무래도 역동성을 들어내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나  그 외에 경서도의 민요들은 큰 무리 없이 전성기의 소리를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가 크다. 특히 이번 무대에 올리게 된 종목들은 국악방송이 실황을 그대로 음반으로 제작한다고 해서 더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다.

대부분의 국악 각 장르가 그러하듯 경서도 명창들의 발표회 역시 그들의 제자나 가족, 일반 애호가들이 모이는 편이나 최창남의 발표회에는 이름난 명창들이 주된 관객이라는 점에서 분위기가 다름을 알게 한다. 60~70년대, 단체를 조직하여 국악공연도 흥행에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김뻑국씨의 말이 기억난다.

“한창 때 최창남씨 인기는 정말 대단했지요. 가령  박동진, 안비취, 이은관을 비롯한 국악인들, 인기절정의 만담가 누구, 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코미디언 누구누구를 멤버로 해서 지방공연을 가도 최선생(창남)이 빠지면 흥행이 안 들어요. 벌써 저쪽(초청지역)에서 먼저 최창남이 오느냐 안 오느냐 부터 묻고 들어오는 겁니다. 온다고 해야 계약이 성사 되는데, 뒤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안 온다고 할 수 없지 않아요? 당연히 온다고 하고 계약을 하지요. 그 정도였어요. 공연이 끝나면 남녀 할 것 없이 팬들이 최창남을 보기 위해 구름같이 몰 들었으니까요. 참 그 땐 대단했는데,”(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