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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국악속풀이 128] 최창남은 경서도 소리의 마술사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2013년 10월 1일 삼성동 소재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경서도 소리판을 벌이게 된 최창남 명창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새로움에 도전하기보다는 기존의 전통을 잊지 않고 충실히 지켜가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지닌 명창이란 점, 그는 산타령의 예능보유자이며 산타령은 <놀량> <앞산타령> <뒷산타령> <잦은 산타령>을 연창하는 소리로 답교(踏橋)놀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노래란 점, 60~70년대, 국악단체를 조직하여 흥행에 성공했던 김뻑국씨 말에 의하면 유명 연예인이 총 동원되어도 최선생(창남)이 빠지면 계약이나 흥행이 어려웠으며 공연이 끝나면 팬들이 최창남을 보기 위해 장사진을 쳤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구한말 유명했던 선소리패들은 이태문의 뚝섬패, 이명길의 왕십리패, 권춘경의 동막패, 소완준의 과천패, 그 외에도 성북동패, 쇠붕구패, 아오개패, 진고개패, 방아다리패, 배오개패, 자하문밖패 등이 있었다고 하나 변화의 물결에 밀려 전문적으로 부르던 소리패에 의한 연창(演唱)은 이미 맥이 끊어진지 오래 되었다.

이창배의 《한국가창대계》에 따르면 “고종  때의 명창으로 뚝섬패의 이동운이 있었는데, 그의 선생이 그 유명한 이태문이었고, 이태문의 선생이 신낙택, 신낙택의 선생이 종대, 종대의 선생이 이의택”이라고 소개하고 있어서 1700년대 말이나 늦어도 1800년 초기에는 오늘날과 같은 산타령이 불렸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산타령의 이름은《증보신구잡가-增補新舊雜歌『고금잡가편-古今雜歌編』『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신구유행잡가-新舊流行雜歌』등 1910년~

1920년대의 잡가집에 보이고 있어 이 시기에는 대중적인 노래로 자리매김 해 왔다는 점도 짐작이 된다. 이명길의 왕십리패 소리는 이창배에게, 그리고 소완준의 과천패는 정득만에게 이어졌으니 최창남 명인이 부르는 오늘의 산타령은 그의 스승 이창배의 왕십리패 소리와 정득만의 과천패 소리의 맥을 이은 정통의 귀한 소리임에는 틀림없다.

1969년 국가는 《산타령》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김태봉, 정득만, 이창배, 김순태, 유개동 등 5명을 예능보유자로 인정한 바 있다. 지정 40여년이 지난 현재 당시의 보유자들은 모두 타계하였고, 제2세대의 선두주자인 황용주와 최창남 2인이 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박태여, 염창순, 방영기, 이건자, 최숙희 등이 전수조교가 되어 산타령을 재건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소중한 자산을 잃을 뻔 했던 것이다.

   
▲ 경서도소리의 마술사 최창남 명인 공연 모습

오늘의 주인공 최창남은 산타령 뿐 아니라, 경기 서도의 긴소리(잡가)나 민요, 대감놀이나 배뱅이굿 까지도 능한 소리꾼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소리인생은 이미 초등학교 시절부터 예고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해방 직전 황해도 연백군에 있는 해남초등학교 4학년 시절이다. 해안가에 살던 그가 학교는 가지 않고 고기잡이 어부들 속에 끼어 ‘배치기노래’를 신나게 부르고 있었는데, 때마침 그 곳을 지나던 일본인 담임교사에게 발각이 된 것이다.

물론 종아리가 터지도록 맞으면서 다시는 민족의 정서를 자극하는 소리판에 끼어들지 않고 학교에 열심히 다니기로 약속을 했단다. 웬만한 소년 같으면 선생의 눈이 무서워 소리판에 얼씬도 하지 않으련만 최창남 소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후에도 번번이 소리판에 끼어서 어른들과 함께 자신만의 끼를 키워왔던 것이다. 선천적으로 소리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그는 해방을 맞아 인천에 정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황해도 출신의 양소운, 임명옥, 최경명 등 당대 명창들에게 산염불이나 난봉가류의 서도소리를 배웠다. 소리 못지않게 장단도 잘 쳐서 이은관의 배뱅이굿은 그의 전매특허였다고 한다.

19세에 벽파 이창배 문하에 들면서 본격적으로 경기소리를 배우게 되었는데, 최창남은 경서도 소리에 알맞은 맑은 목도 타고 났고, 고음과 저음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릴 수 있는 넓은 음역과 소리를 만들어가는 기교나 표현력이 특출해서 스승의 소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나 수준이 남달랐다는 것이다. 노력의 결정은 수료 후에 곧바로 나타났다.

벽파 스승은 그의 소리실력을 높게 인정하여 보조강사로 채용하고 당신이 방송이나 외부의 강의 차 자리를 비울 때는 항상 최창남에게 지도를 맡겼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경서도 명창들 중에서 최창남 앞에 소리를 다듬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타고난 목과 강유(剛柔), 명암(明暗), 농담(濃淡)을 표현하는 현란한 기교는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그의 영역이다. 그래서 그에겐 희로애락의 감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소리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것이다.

이번 공연은 오래전 최창남 명창을 기억하고 그의 소리를 잊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는 많은 팬들에게 매우 귀중한 선물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