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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즉흥음악의 명인이었던 백인영 선생(1)

[국악속풀이 129]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난주에는 소리판을 펼치게 된 경서도 소리의 간판, 최창남 명창 이야기를 하였다. 나이 80에도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에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60~70년대, 국악단체를 조직하여 흥행에 성공했던 김뻑국씨는 “한창 때 최창남씨 인기는 정말 대단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멤버들이 공연에 참가한다고 해도 최선생(창남)이 빠지면 흥행이 안 된다는 증언을 해 주었다.

19세에 벽파 이창배 문하에 들었는데 그는 경서도 소리에 알맞은 맑고 구성진 목과 넓은 음역, 기교나 표현력이 특출나서 수료와 더불어 보조강사로 채용되었다는 점, 타고난 목과 강유(剛柔), 명암(明暗), 농담(濃淡)을 표현하는 현란한 기교는 누구도 넘을 수 없는 그의 영역이어서 감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소리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는 점을 이야기 하였다.  

이번 주에는 즉흥음악의 1인자였던 고 백인영 명인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을 쓰기로 한다. 그는 가야금과 아쟁의 명인이었으나 지병으로 작년 가을 고인이 되었다. 그의 타계 1주년을 기리며 제자들과 선후배 음악인들이 1013년 10월 13(일) 오후 5;00시에 대치동 소재 <한국문화의 집>에서 추모음악회를 마련한다.

   
▲ 생전에 아쟁을 연주하던 백인영 명인 모습

 그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며 가까이 지내던 필자는 아래와 같은 추모사를 보냈다. 그가 어떤 음악인이었나 하는 이야기를 얼레빗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백 선생! 오랜 만이오.
그곳 하늘나라에서도 여전히 바쁘게 지내고 계시오?
그렇게 좋아하던 소주도 한잔 하시며 흥이 나거나 이승의 생각이 나면 가끔 가야금이나 아쟁도 만지면서 지내시겠지? 이렇게 길 갈라서니 시간은 왜 이토록 빠르게 지나가는지 모르겠소.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던 당신의 모습이 영 지워지지 않고 자꾸만 떠오르는 걸 보면 우리가 가깝게 지내긴 했던 모양이오.

우리가 처음 만나기는 30년 전 모 방송국이었던 같소. 당신의 음악을 처음 대하는 순간, 나는 내 몸에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오. 마치 진흙으로 사람도 만들고, 나무도 만들고, 집도 만들듯 변화무쌍한 선율을 만들어 가며 방청객들을 홀린 당신이야말로 끼로 뭉쳐져 있던 국악인, 아니 <쟁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가까운 호칭이었다오.

얼마 후, 나는 당신을 초청하기 시작하였는데, 아마 매학기 한 번씩은 정례적으로 우리가 만났을 겁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당신의 제자들과 함께 기꺼이 응해 주면서 산조나 시나위 등의 전통음악과 목포의 눈물, 타향살이를 비롯한 우리의 대중가요, 그리고 세계 여러나라의 유명한 음악들을 연주해 주었지요.

학생들의 환호와 앙코르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열정을 불태우던 그 때의 기억은 참으로 아름답게 남아 있소이다. 당신을 초청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또한 고맙게 생각했는지 모른다오. 당신은 어떤 음악이든지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진정한 이 땅의 쟁이,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즉흥음악의 선두주자였다고 나는 감히 말합니다.

   
▲ 백인영 명인의 아쟁 연주 모습

남들은 한 가지 악기도 제대로 다루기 어려워하는 터에 당신은 가야금이면 가야금, 아쟁이면 아쟁, 북이나 장고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만능이었고 또한 즉흥연주나 퓨전, 작곡의 능력까지 인정받게 되어 세인의 부러움과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배경에는 당신이 음악적 재기(才氣)를 안고 태어났고, 다음은 어려서부터 음악적 환경에서 자랐다는 점이며, 그리고 누구보다도 음악에 대한 사랑이나 열정이 강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어린 시절, 세상이 알아주던 명인이나 명창들을 집에 모셔와 소리도 배울 수 있었고, 북이며 장고, 그리고 가야금이나 아쟁과 같은 악기들을 배울 수 있도록 음악적 환경을 마련해 주신 부모님의 배려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합니다.

당신은 17세라는 젊은 나이에 이미 KBS 목포방송국의 전속악사가 되었고, 그때부터 피아노와 함께 가야금으로 퓨젼음악을 선보임으로 해서 전통음악이란 한정된 공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곤 하였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던 여성국극단에 입단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대 명인 명창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음악인생을 배우면서 자신의 음악세계를 더욱 탄탄하게 만들어 온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음악적 경험은 많으면 많을수록, 이르면 이를수록 자신의 음악세계에 큰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 있는 것이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