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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백인영 앞에서 함부로 가야금 타지 말라

[국악속풀이 130]

[그린경제=서한범 교수]  지금 속풀이는 지난주에 이어 즉흥음악의 1인자였던 고 백인영 명인에게 보내는 추모의 글을 쓰고 있다. 그는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즉흥음악의 선두주자였다는 점, 음악적 재기(才氣)를 안고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음악적 환경에서 자랐고 누구보다도 음악에 대한 사랑이나 열정이 강렬했기 때문에 그러한 명성을 얻었다는 점, 17살에 KBS 목포방송국의 전속악사로 있으면서 퓨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여성국극단에 입단하여 명인명창들의 음악인생을 배우면서 자신의 음악을 탄탄하게 만들어 왔다는 점들을 이야기 하였다. 그 다음 추모의 글을 이어가도록 하겠다.
 

   
▲ 고 백인영 명인 추모공연에서 명인들이 함께 연주한 시나위 합주

백인영 선생!
지상파 방송을 통해 국악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연예와 오락, 그리고 사극(史劇) 드라마의 반주음악이나 영화음악에 있어서도 당신의 아쟁이나 가야금 소리는 빠지지 않았지요. 아니 빠지게 되면 극 분위기가 살아나지를 못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오. 당신이 구슬프게 문질러 대는 아쟁소리에는 서민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고 가야금 12줄이 희롱하는 소리에는 여인들의 고달픈 삶이 녹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연주에 손수건을 적셨던 것이오.

“백인영 저 친구 앞에서 가야금 함부로 타지마라.”는 말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재미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말이지요.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정도로 세상에 널리 이름이 나있는 어느 가야금 명인에게 판소리 원로 명창 한 분이 조심스럽게 경고한 말인데 아직 그 말이 잊히지 않고 있다오.

1980년도 <국풍 80>공연에서 클라리넷의 길옥윤이나 기타의 신중현, 대금의 이생강 등과 어울려 당신의 가야금이 세인들을 놀라게 한 것도, 그리고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86아시안게임 전야제 공연에서 당신의 아쟁, 김영자의 구음(口音)으로 무용을 반주할 때, 관람하던 대통령이 극찬을 하면서 비서에게 “저 음악을 복사해 오라.”고 지시했다는 일화 역시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오.

백인영 선생!
1986년 11월 호암 아트홀에서 가진 첫 개인 발표회에서 당신이 연주한 <유대봉류 가야금 산조>는 “당신의 스승 유대봉 명인이 환생하여 가야금을 연주한 것 같은 음악회”라는 평가를 받지 않았소? 그리고 1999년 뉴욕의 링컨쎈타에서 피아노의 임동창과 함께 “동서양의 하모니"라는 즉흥음악을 연주하여 입장한 모든 청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어 여러 차례 앙코르를 받았다는 뉴스도 생생하게 기억이 되고 있다오.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던 백인영 선생,
나라 안팎으로 바쁘게 활동하면서도 후진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전수하는 일은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던 당신, 당신의 제자들로 구성된 <예랑실내악단>을 2000년에 창단하고 제자들과 함께 해마다 정례발표회와 초청공연을 지속해 오면서 퓨전음악도 만들고, 연주곡목을 확대시켜 수시로 무대 위에 서 왔지요. 그럴 때마다 전통음악을 기본으로 하고 그 바탕위에 새로움을 시도하기 때문에 당신은 언제나 청중들로부터 호응을 받은 것이 아니겠소?

   
▲ 고 백인영 명인 추모공연에서의 유대봉제 백인영류 가야금산조보존회의 유대봉제 백인영류 가야금산조 공연

2004년 <전주세계소리축제> 기억하시오?
당신의 즉흥연주가 끝나자마자, 앙코르와 함께 객석에서 “낙엽”을 외치면 당신은 바람에 떨어져 이리저리 나뒹구는 낙엽을 표현하였고 “바다”라는 주제를 던져 주면 당신은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는 배나 파도를 상징하는 음악을 연주했던 일말이오. 당신처럼 즉흥성과 음악적 창의성이 없다면 이러한 연주는 가능치 않았다는 점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터라오. 그래서 당신은 악보란 실로 불충분한 약속에 지나지 않는 허울이요 굴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음악자체를 악보로부터 분리시켜온 진정한 쟁이였습니다. 또한 당신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따듯한 심성의 소유자로 자기주장이 분명한 이 시대의 진정한 쟁이였다고 나는 평가합니다.

국악입문 5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를 마치고 “연주자란 언제나 청중과 혼연일체가 되어 청중의 가슴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 심금을 울려 주어야 하며, 죽을 때까지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음악인으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러한 일념으로 남은 삶을 음악과 함께 살아가고 싶습니다.”라는 소감을 말하고 서서히 돌아서는 당신의 그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오. 더 이상 당신의 살아있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점이 가슴을 저미게 할 뿐입니다.

백 선생, 이제 제자들이 정성껏 준비한 당신의 1주기 추모 음악회에 내려와 제자들도 안아주고 당신을 위해 참석해 준 선 후배, 동료 국악인들이나 애호가들에게도 그곳 이야기들을 전해주기 바라오. 그리고 내년에 또 만나기로 합시다.
부디 잘 가시고 평안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