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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판소리고법 김청만 명인의 고법발표회

[국악속풀이 135]

[그린경제/얼레빗 = 서한범 교수]  지금 국악속풀이는 산조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지난주에는 성공의 비결이 한결같이 그러하듯, 산조음악의 정점에 오르는 길에도 요령이나 지름길은 따로 없다는 이야기, 그래서 반복하고 또 반복 연습해서 익숙해지는 길이 곧 산조음악에 접근하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그 과정에 관련음악을 충분히 듣고 구음(口音)으로 소리를 내며, 귀와 몸과 마음에 이르기까지 그 음악이 서서히 배이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과거의 구전심수(口傳心授)방법은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선생의 가락을 충실하게 전수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장점을 지닌 방법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다.

잠시 산조의 이야기를 뒤로 하고, 오늘은 김청만 명인의 고법 발표회 이야기를 먼저 하고 돌아오도록 한다.

전쟁으로 인해 인명도, 재산도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그래서 불타버린 집이나 학교의 건물을 다시 짓고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찾는 등, 1950년대 중 후반은 복구 작업에 여념이 없던 그 시절은 춥고 배고프던 고난의 시기였다. 그래서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네  살림은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시기, 13살 어린 나이에 장고를 메고 농악단원이 되어 당시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던 <임춘앵 여성국극단>이나 <햇님국극단>을 따라 다니던 소년 악사가 있었다.  

   
▲ 무형문화재 판소리고법 예능보유자 김청만 명인(사진작가 이진환 제공)

바로 이번 2013년도에 판소리 고법의 예능보유자가 되어 11월 23(토), 오후 5시, 서울 삼성동 소재 무형문화재 전수회관에서 그 첫 발표회를 열게 된 김청만 명인이다. 이번 공연에는 그의 제자들이 준비한 비나리를 시작으로 유영애의 판소리 흥보가, 원장현의 대금산조, 김영길의 아쟁산조, 김운선의 살풀이 등, 당대 최고 수준의 명인들이 초대되어 김청만의 장단과 함께 멋진 조화를 만들어 갈 예정이다.

청년시절, 그에게 북이나 아쟁과 같은 악기를 가르쳐 주던 한일섭 명인은 다음과 같은 따끔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고 한다. “훗날 판소리가 많이 성하게 되면 고수가 부족하게 될 터이니 지금부터라도 판소리 고법을 제대로 익히도록 하라” 당시 한일섭 명인의 집에는 판소리 북이며 태평소 시나위, 아쟁산조 등을 배우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오늘날의 유명 국악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선생의 예견은 적중하였고, 청년 김청만은 남다른 집념으로 정진한 끝에 1982년도에는《국립창극단》에 입단하게 되고 서서히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북장단을 인정한 많은 소리꾼들이 그의 북에 소리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명창이 오정숙(吳貞淑)이었다. 그 이후에는 소리꾼뿐만이 아니라 내로라하는 한국의 명인 명무들도 그의 장단에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아직 김청만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국악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아마도 1988년《국립국악원》으로 자리를 옮겨온 이후가 아닌가 한다. 어느 날, 국립국악원의 민속음악 발표회에 참석했던 필자는 시나위 합주에서 장고를 잡고 음악을 이끌어 나가는 연주자를 보고 그 연주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장단의 정확성은 말할 것도 없고 강약의 조화를 살려가면서 전체적인 음량을 조절하는 능력이나 독주악기들의 가락에 따라 적절한 호흡을 맞추어 짜임새 있는 합주음악을 연출해 내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합장단이나 채편 소리가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힘이 실려 있는 소리인가 하면 왼손의 부드러움은 또한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의 기량이었던 것이다.
 
김청만이라는 장고 연주자가 국립국악원에 왔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으나, 그날 밤 그의 연주는 필자뿐 아니라 모든 청중을 사로잡기에 출중한 기량이어서 우리는 민속음악계에  등장한 김청만이라는 새로운 스타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