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일본이 금세기 조선에 저지른 최대한 죄악을 꼽는다면 단연 ‘조선 침략’을 들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악랄한 점을 하나만 꼽는다면 문화재약탈이라고 필자는 지적하고 싶다.
“능묘의 발굴이라는 내지(內地, 일제강점기에 일본을 가리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식민지조선에서는 경외감도 기피감도 없이 그리고 학자의 도덕적 양심도 없이 일어났다. 이는 조선총독부의 압도적인 지원에 의한 것으로 특히 동경제국대, 교토제국대라는 관학(官學)아 카데미에 의한 조사사업으로 발굴한 문화재는 모두 이들 대학으로 가져갔다”
양심적인 시민단체가 꾸려가는 일본 고려박물관에서 발간한 《잃어버린 조선 문화유산》에서는 식민지 아래서 자행한 일본의 문화재약탈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6~8쪽에서는 세키노다다시(関野貞, 1868-1935)라는 인물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 대동강 고분 발굴조사 현장 1909년, 일본순사 감시 하에 조선인 인부들이 도굴을 하고 있으며 여성들이 물동이를 나르는 모습도 보인다.
▲ 고구려벽화가 그려져 있는 고분을 파헤쳐서 나온 현무도 1912년
한국인으로서 “능묘의 도굴”이라는 말에 분개를 느끼며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왕릉의 도굴”은 천인공노할 노릇임을 재천명하고 싶다. 그에 앞장섰던 세키노다다시를 일본은 지금도 문화재계의 대석학으로 추켜세우고 있다.
“전후(戰後,1945년 패전 이후를 말함)일본에서 세키노에 대한 평가는 식민지하에 낙랑유적,유물을 비롯하여 문화재에 대한 치밀하고 과학적으로 우수한 조사를 실시하여 조선문화재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고 이 책은 소개하고 있다. 물론 고려박물관이 세키노다다시를 옹호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바로 세키노다다시에 대한 조선의 평가를 소개하고 있다.
▲ 세키노타다시
“한국과 북한에서 세키노다다시에 대한 평가는 일본과 다르다. 세키노의 최대 성과라는 고구려고분, 낙랑군 조사에서 그는 식민지행정의 최대 수혜자로 총독부가 말하는 이른바 ‘식민사관’ 자료를 제공하고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세키노다다시라는 인물 출현 이후 조선에서는 민간인까지 합세하여 도굴 붐이 일었고 세키노로 인해 조선의 문화재 약탈이 시작되었다. 세키노는 한마디로 조선문화재 약탈의 기초작업을 한 인물이다.”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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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노다다시는 제국대학 졸업 후 나라현의 문화재관련 기사였다. 그러던 그가 1902년 한국건축조사를 위해 조선땅에 발을 디딘 이래 1909년부터는 해마다 조선고적답사를 한다. 물론 조선총독부가 두툼한 출장비를 주고 칙사 대접을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당시 총독부로서는 ‘우수한 조선을 열등한 민족’으로 만드는 이른바 ‘식민사학’에 혈안이 되어 있던 때로 세키노다다시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이들의 은밀한 거래는 공공공연히 이뤄졌다.
“조선고적답사에서는 총독부의 주도아래 건축, 고분, 성곽, 사원 등을 조사하고 낙랑군, 고구려고분 발굴조사를 하는 등 방대한 자료를 조사시켰다. 이들 조사결과는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전 15권, 1915~35)>, 《지나불교사적(支那佛敎史蹟), 전 12권, 1925)으로 간행했다”고 고려박물관은 밝혀놓고 있다.
조선과 중국의 사적지를 조사한 까닭은 한마디로 조선총독부의 열등의식의 반영이다. 총독부는 찬란한 역사의 조선을 ‘중국 한문화(漢文化)의 식민지’로 둔갑시키기 위해 발버둥을 쳤는데 중국불교사적답사를 통해 그것을 입증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의 불교 유적은 엄연히 다르다.
- 고려박물관에서 발간한 《잃어버린 조선 문화유산》에서는 세키노다다시의 “조선고적답사사업”의 문제점을 다음 9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1)총독부권력의 주도와 든든한 백그라운드
2)일본관학 아카데미의 독점
3)인류학, 고고학, 건축학이 혼연일체가 되어 식민사관 돌입
4)중국 동북지역과 조선 점령지의 조사 발굴
5)고적조사 5개년 계획으로 철저 조사 발굴
6)식민사관을 토대로한 연구, 발굴에 주안점을 둠
7)연구라는 미명하에 식민사관 형성에 기여하게 한《고적조사보고서》와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호화판으로 제작
8)조선총독부박물관에 이를 전시하여 식민지배의 사회교화 방편으로 사용
9)고적조사는 조선의 토지조사사업과 연대하게 되며 조선의 《지형, 지세도‘地形,地勢圖’》,《임야도‘林野圖’》,《고적명승도‘古蹟名勝圖’》등은 식민지배를 위한 토대였다.
▲ 세키노타다시가 '한국건축조사보고'에서 극찬한 불국사 사리탑은 이후 보고서 발간 이후 일본으로 밀반출 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 |
고려박물관 측이 점잖게 표현해서 그렇지 ‘세키노다다시의 죄목 9가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특히 “내지(일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왕릉을 함부로 들쑤셔 놓은 죄”에 대한 사죄 없이 세키노다다시를 고고학의 대부라고 치켜세우는 일본 학계도 비난을 면치는 못할 것이다.
특히 2005년도에 동경대학에서 연 세키노다다시의 “아시아답사” 심포지엄 역시 석고대죄부터 하고 시작했어야 했다. 백주 대낮에 왕릉을 파헤쳐 도굴한 유물은 유물이기 이전에 도굴품이다. 유입경로가 바르지 않은 것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선언은 있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나마도 이러한 문제를 소상히 알리고 있는 고려박물관의 양심적인 일본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 조선고적도보, 이러한 책들은 한국의 보물창고를 소상히 밝혀주는 것으로 이후 도굴과 문화재 약탈의 기초자료로 쓰였다
세키노다다시, 그는 고고학의 대부 이전에 한국인에게는 왕 도굴꾼이다. 도둑맞은 물건은 경찰이 철저히 조사해서 범인을 잡고 그 물건을 되돌려주는 게 세상의 이치다. 따라서 국가주도로 조직적으로 이뤄진 일본의 조선의 문화재 약탈은 그 전모가 밝혀져야 하며 훔쳐간 것들은 조속히 돌려줘야 한다.
*여기에 인용한 글은 모두 필자의 일본어 번역이다. 원본은 일본 고려박물관 발간 2010년 《失われた朝鮮文化遺産》일본어판이다.